[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비자림로는 느리게 가는 길입니다



얼마 전 제주 비자림로의 도로 확장을 위해 삼나무 900여 그루가 잘려나갔다. 시민들과 환경단체 등의 국민청원과 항의로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 지역경제를 위한 정책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 신공항 건설을 위한 개발의 시작이라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새로운 대안을 위해 공사는 중단됐지만, 언제나 그렇듯 개발과 보호가 맞설 때는 대부분 개발로 밀어붙였던 과거의 행정이 되풀이될 것 같아 우려된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되기도 한 비자림로는 제주에 가면 한두 번씩 지나가게 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근의 비자림과 산굼부리, 사려니숲에 들르기 위해 비자림로를 지나게 된다. 어쩌면 아무 목적 없이 길게 뻗어 있는 삼나무를 배경으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걷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셀 수도 없이 지나간 도로에서 차가 막혀 거북이 운전을 한 경우가 많았다. 시간에 쫓겨 화를 내기도 했지만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돌리거나 창문을 열고 삼나무 숲 어디선가 불어오는 나무바람 냄새를 맡으며 뜻밖의 여유를 갖곤 했다.

비자림로를 통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도민들에게는 한가한 풍경 놀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풍경만 보고 학습된 감동에 길들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문득 멈춰서 발견한 자연경관은 삶의 쉼표를 갖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자연과 교감의 순간이자 성찰의 시간이다. 도로가 확장되면 차들은 더 몰려들 것이다. 더 많은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숲이 훼손될 것이다. 새로운 대안은 없다. 있다면 더 이상 삼나무를 베지 않는 것뿐이다. ‘비자림로는 느리게 가는 길입니다.’ 이 말이 감상적·감정적 표현이 아닌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이 될 수는 없을까. 때로는 질주가 아닌 멈춤과 느림의 시간을 누려야 한다. 그 누림은 우리에게 삶의 여유와 성찰을 줄 것이고, 지구라는 환경공동체의 경제적 이득을 분명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다음 세대까지 사는 사람들이다.

김태용 (소설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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