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최인훈, 지성과 감각의 태풍



소설가 최인훈 선생이 돌아가셨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과도 인연이 있다면 몇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최인훈 소설가와 오규원, 김혜순 시인의 글과 존재에 빠져 서울예대 문창과를 가고 싶었지만 나 같은 녀석이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포기하고 말았었다. 군 제대 후 대학을 자퇴하고 골방에서 책과 영화를 보며 3년의 시간을 보내던 때에도 최인훈의 소설들이 펼쳐 보이는 고독과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대표작 ‘광장’보다는 ‘회색인’과 ‘서유기’ 그리고 단편 소설들에 더 매료되곤 했다. 최인훈처럼 쓸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각오로 습작을 하던 시절이었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원당에 있는 추어탕 집에서 최인훈 선생을 본 적이 있다. 뒷자리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수 없어 식당의 유리창에 반사된 모습을 훔쳐보았다. 유일하게 들리던 말은 손녀로 보이는 아이에게 ‘맛있니, 많이 먹어라’라는 말이었다. ‘선생님의 글을 좋아합니다’라고 몇 번이나 다가가 말을 건네려다 말았고,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학생이 아닌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오래전 퇴임한 최인훈 선생의 연구실이 그대로 있다. 자신의 연구실을 치우지 말라고, 가끔 학교에 전화를 걸어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그 방에 들어갈 일이 몇 번 있어 호기심에 서랍도 열어보고 선생님의 도장과 레터 나이프 등을 만져보기도 했다. 지독하게 엄격하고 고집스럽다던 뒷얘기들도 멀리서 선망하던 나에겐 작가의 아우라로 남아 있다. 영결식을 다녀온 뒤 최인훈의 ‘태풍’을 다시 읽고 있다. ‘KOREA’를 뒤집은 ‘애로크’라는 지명으로 한국을 지칭하는 그의 비애와 유머를 떠올린다. 한 남자가 생각에 잠겨 걸어간다. 그가 걸어간 자리마다 고요한 태풍이 분다. 언어로 이루어진 태풍. 밀실과 광장에 부는 태풍. 우리의 지성과 감각으로 남을 태풍과 함께 이 지독한 여름이 지나갈 거라 믿는다.

김태용 (소설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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