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무지개 기억



살다보면 일상의 규칙과 사물의 배치를 달리한 것뿐인데 지구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마음의 상태가 변한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며칠 전 작업실에 앉아 있을 때 평소와 달리 블라인드를 올려보기로 했다. 블라인드를 올리자 창밖의 흔들리는 은행잎들 너머의 구름 저편으로 엷은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지개, 놓칠 수 없다”라고 중얼거리며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며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손을 움직여 블라인드를 올리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렇다. 나는 2018년 7월 3일 무지개를 보았다. 어쩌면 찾았는지도 모른다.

2017년 5월 2일에도 태양 주위를 감싸는 무지개를 보았다. 당시 머릿속과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회색 눈보라를 견딜 수 없어 짧은 일정으로 제주도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무지개라기보다는 햇무리라고 할 수 있는 색채의 동심원을 보고 가느다란 희망을 잠시 얻었다. 같은 태양이지만 제주도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무지개를 본 기억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장면들은 희미해져 있다. 단 하나의 장면만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열한 살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당시 살고 있던 옥탑방 맨바닥에 누워 낮잠에 빠졌다. 일어났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비가 내린 뒤였다. 허기와 몽롱함 속에서 옥상으로 나와 철제 계단에 걸터앉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지만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하고 생각하며 멍한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산 중턱에 걸려 있는 무지개가 보였다. 아이답게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눈을 찡긋거리고 손을 오므렸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역시 아무도 없는 빈집의 거울을 보며 나는 최초의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나를 나라고 부르지, 왜 나는 나일 수밖에 없지. 앞으로 몇 번 더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흘러 사색과 공상이 일상의 주를 이루게 된다면 무지개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나는 왜 여전히 나를 나라고 부르지.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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