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태용] 엄청 매우 가능한 글쓰기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소를 지을 수도,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다. ‘뭐가 엄청 매우 가능한 글쓰기라는 거야?’라고 댓글을 달수도 있을 것이다. 더 악의적인 댓글들이 달리면 어째서 나는 저런 제목의 글을 쓰게 됐나 하고 잠시 동안 엄청 매우 심란한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소설 창작 강의를 하면서 문장에 대한 대화를 많이 하게 된다. 문체(文體)와 문채(文彩)가 동시에 작동하는 작가의 의식세계가 문장이다. 명료하고, 독창적이면서 경제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 인데 묘사, 서술, 설명으로 이뤄진 문장의 세계 속에서 부사, 형용사(일명 부형사)의 쓰임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형사를 너무 많이 쓴 것 같아요, 그러면 부형사는 왜 쓰면 안 되나요, 라는 말들이 소설 합평 시간에 자주 오간다. 문장은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한다는 문장경제논리를 앞세우면서 부형사가 문장의 격을 떨어뜨리거나 설명적으로 돼 독자의 감각과 감정을 마비시킨다, 라고 정리하곤 한다. 하지만 부형사가 그렇게 악마의 어휘들인지 의문이 든다. 요즘에는 부형사를 위한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고, 어떤 글에서는 그냥 써버리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몬드 카버 등은 부형사 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스티븐 킹은 부사를 민들레에 비유해, 잔디밭의 민들레는 예쁘고 독특하지만 당장 뽑지 않으면 이튿날에는 엄청 불어나 잔디밭을 망치게 된다며, 부사의 유혹을 떨쳐 버리라고 했다. 반면 에드거 앨런 포, 러브크래프트, 커트 보니것 등의 작가들은 부형사를 자유롭게 쓰고 있다. 부형사는 정말 글쓰기의 질서와 집중력을 해치게 만들기만 할까. 작품과 글쓰기의 방향성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완결성 안에서 검토돼야겠지만, 어느 날에는 언어의 유혹에 이끌려 부형사를 무차별적으로 많이 쓰고 싶어진다. 이 글의 원래 제목은 이렇다. 엄청 매우 다채롭고 가능한 글쓰기를 위해 훨씬 많은 부사를, 아름다운 형용사를.

김태용(소설가·서울예대 교수)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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