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⑧ 공주외국인선교사묘역

충청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최초로 순직한 로버트 아서 샤프 선교사(왼쪽 사진)와 순직한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교육선교에 앞장섰던 사애리시 선교사.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이 충남 공주 외국인선교사묘역 내 샤프 선교사 묘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공주=강민석 선임기자
 
영명중·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탑.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


숙소를 나와 금강을 따라 강경 부여를 거쳐 공주로 향하는 코스에 들어섰다. 고대 백제 문화를 품고 있는 금강은 철새들의 낙원이자 생명이 숨 쉬는 강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넣어 금강(錦江)이라 했을까.

금강은 강폭이 넓고 강물이 유유히 흘렀다. 얇게 출렁이는 물결이 마음의 파장을 일으켰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내가 어릴 때 자라던 충남 부강까지 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순례길을 걸으면서 불편했던 몇 가지가 있었다. 숙소가 대부분 시골에 있어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선 한참을 나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또한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과 옷 세탁 공간이 없다는 것도 불편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순례를 시작할 때 순례자 여권(크레덴시알)을 받으면 성당 개인집 등 순례길 가까이에 있는 공동 합숙소에서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저렴한 숙박료에 세탁은 물론 조리도 가능하게 해 놨다. 한국도 순례길이 생기면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면 좋겠다. 순례객이 늘어나면 시골교회나 마을회관이 순례자를 위한 숙소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사업으로 시작된 공주지역 선교

금강을 넘어 공주로 들어왔다. 공주 전통마을을 지나 무령왕릉 옆을 지나갔다. 시내를 통과해 영명중·고등학교에 들어섰다. 운동장 옆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동산에 비석과 묘지가 보였다. 공주외국인선교사묘역이다.

이곳에는 충청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최초로 순직한 로버트 아서 샤프 선교사(1872∼1906)를 비롯해 영명학교 교장이었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1907∼1994)와 딸 올리브(1909∼1919), 찰스 C 아멘트 선교사의 아들 로저, 테일러 선교사의 딸 에스더 등 5개의 묘가 있다.

샤프 선교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출생해 1903년 오벌린대를 졸업하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내한했다. 서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했으며, YWCA에서 헐버트와 함께 기독교 청년운동을 벌였다. 샤프 선교사의 부인은 1900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먼저 한국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앨리스 하몬드 선교사(한국명 사애리시·1871∼1972)였다.

감리교 한국연회는 1904년 샤프 선교사를 공주지역 책임자로 선정했다. 그는 1905년 여름 부인과 함께 공주로 내려와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초가집에서 소규모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명설학당이라 불렀다.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를 중심으로 논산 천안 홍성 진천 보은 등 충청권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부인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5년 집에서 여학생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영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선학당을 운영했다. 당시 보수적인 문화가 팽배하던 이곳 공주 지역에서 교육 사업이 복음 전파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남편 잃은 슬픔 딛고 유관순 키운 선교사

1906년 2월 샤프 선교사는 논산교회 등을 순회하다가 진눈깨비를 피하려고 상여집에 들어가게 됐다.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상여를 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샤프 선교사도 장티푸스에 감염돼 그해 3월 5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온 지 3년, 공주에 정착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의 고통은 어땠을까. 그녀의 기다란 무덤 옆에 서 보니 112년 전 그녀가 느꼈던 참담한 심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2·8독립선언과 공주지방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2회 졸업생인 조병옥 박사는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었으며 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남편이 죽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2년 뒤 다시 조선을 찾아 충청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그녀는 대전감리교회 설립에 기여했으며 1909년 강경 만동여학교와 논산 영화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녀는 공주뿐 아니라 천안 강경 등을 순회하며 사회복지 활동과 교육 활동에 크게 기여했으며 충남 감리교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특히 그녀는 영명여학교에서 인재를 길러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그녀는 어렵게 지내는 가정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지원했는데, 대표적 인물이 유관순 열사다. 그녀는 1914년 천안 병천의 시골소녀 유관순을 영명학교에 입학시켜 가르쳤으며, 1916년 이화학당 3학년에 편입시켰다. 또한 한국 최초의 여성목사 전밀라, 한국 최초의 여자경찰서장 노마리아 등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녀는 1940년 일제에 강제 추방될 때까지 선교와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대 이어 한국 도운 윌리엄스 선교사 부자

샤프의 뒤를 이어 윌리엄스 선교사가 이곳에 부임해 학교 이름을 영명학교로 바꿨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35년간 공주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해방 후 미군정청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내한해 한국농업발전에 기여했다. 6·25전쟁 이후 선교사로 복귀해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다가 54년 은퇴했으며 62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했다.

한국명 우리암으로 불렸던 윌리엄스 선교사는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며 아들 조지의 한국명을 우광복이라고 지었다. 조지는 해군 군의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하지 중장의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4년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공주에 잠든 동생 올리브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1919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이국 땅에서 눈감은 여동생 올리브를 평생 잊지 못했던 것이다. 나란히 서 있는 남매의 묘비를 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영명은 ‘영원한 광명’이라는 뜻으로 ‘영’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영생을 의미한다. ‘명’은 창세기 1장 1∼5절의 빛을 뜻한다. 샤프와 사애리시, 아버지 윌리엄스와 아들 조지 등 국권을 빼앗긴 세계 최빈국에서 이름도 없이 헌신했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섬김이 지금의 자유민주주의와 교육강국, 선교대국의 기틀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사 묘역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영명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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