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유독 일본만 ‘미투’ 운동에 침묵하는 이유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지난해 10월 도쿄에서 자신의 성폭행 피해 경험을 담은 책 ‘블랙박스’와 관련해 기자회견에 응하고 있다. 이토는 지난 2015년 일본 최대 민영방송사 TBS의 고위 간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을 폭로한 뒤 오히려 일본에서 비난을 받았다. AP뉴시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고발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은 미국을 넘어 지구촌 전체를 강타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 이후 미투 운동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미투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어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다.

외신들은 미투 운동에 침묵하는 일본을 분석한 기사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이들 기사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이 있다.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28)다.

이토는 2015년 일본 최대 민영방송사 TBS의 고위 간부인 야마구치 노리유키(53)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대부분의 성폭행 피해자들이 그렇듯 이토 역시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사건 발생 5일 뒤에야 경찰서에 달려갔다. 경찰은 처음에는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다가 이토가 호텔 CCTV 영상 등을 증거로 확보한 뒤에야 마지못해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경찰은 야마구치를 체포조차 하지 않았고, 검찰 역시 질질 끌다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야마구치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가까운 사이라 정치적 압력이 작용했다는 추측이 잠깐 나왔지만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곧바로 시들해졌다.

하지만 이토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지난해 야마구치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행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당시 온라인 댓글들은 이토가 야마구치를 유혹했으며 유명인의 삶을 망치려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일부 여성들도 이런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사회의 침묵과 싸우리라 결심한 이토는 이런 내용을 지난 10월에 발간한 책 ‘블랙박스’에서 고발했다.

성범죄 전문 변호사 쓰노다 유키코는 일본의 진보적 시사잡지 ‘주간 금요일’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토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또 피해 사실을 어렵게 공개한 여성들이 같은 여성들로부터 비난받는 일이 잦은 일본에서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하추’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 이토 하루카를 비롯해 몇몇 여성들이 이토 시오리의 폭로를 보고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성추행 경험을 밝혔다가 도리어 비난만 받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해외 언론은 체제에 순응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뿌리 깊은 남존여비 사상도 미투 운동 확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고,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동정심조차 갖지 않게끔 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경우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에서 선진국 중 최하위권을 맴돌 만큼 남녀 차별이 심하다. 지난해 보고서에서 일본은 조사 대상 144개국 중 114위였다. 한국은 118위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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