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원초적 움직임’의 미학


 
우 형사(오른쪽)와 장성민의 마지막 결투장면. 강원도 태백 철암역 탄광촌에서 찍었다. 영화사 제공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면이자 영화의 도입부. 폭우 속 계단 위에서 살인이 일어나는데, 이때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흐른다. 영화사 제공
 
계단 장면을 찍은 곳은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40계단'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그 주위에 판잣집들을 짓고 살았다(위 사진). 깡패 같은 우 형사(오른쪽)와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모범생 김 형사(아래 사진). 영화사 제공
 
이명세 감독. 뉴시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긴 계단 위에 한 남자(송영창)가 서 있다. 계단 아래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자(안성기)가 그를 공격한다. 피가 흩날리고 남자(송영창)가 쓰러진다. 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모든 움직임은 느린 화면으로 펼쳐진다. 빗소리와 함께 호주 록 밴드 비지스(Bee Gees)의 노래, '홀리데이(Holiday)'가 들려온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시작이자, 이 영화의 독특함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이다.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경찰에게 마지막으로 요청했던 노래도 비지스의 ‘홀리데이’였다. 범죄자가 생의 끝에서 왜 이 노래를 듣고 싶어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범죄 장면에 왜 이 곡을 다시 호출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두 경우를 관통하는 어떤 정서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홀리데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이 노래의 분위기, 그리고 폭력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발생시키는 기이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참혹함에 더해진 허망함과 공허함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

분명한 것은 위의 장면이 겨냥한 바도 바로 이러한 감정을 최대한 ‘영화적’으로 구축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이 장면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살인이라는 행위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늘려 시각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잡음을 모두 소거하고 오직 빗소리와 팝송만을 살려 청각적으로 감흥을 돋우는 것이다. 그 순간에 흘러넘치는 정념이 살인의 동기, 혹은 범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압도한다. 지강헌이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요구함으로써 범죄자로서 자신의 처참한 마지막 시간을 미학화한 거라면, 이 영화에도 비슷한 말을 해볼 수 있겠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저 계단 장면은 영화의 유일한 목표를 압축한다. 그것은 폭력의 미학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단 한 줄만으로도 정리된다. 살인자는 도망가고 형사들은 쫓는다. 그 외 서사상으로 가능한 곁가지들은 모두 제거되어 있다. 범죄의 이유는 물론 인물들의 전사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의 내적 갈등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살인자 장성민(안성기)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아는 바가 없다. 대신 여기에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동선만이 있다.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서사적인 유기성이 끊어지는 대신, 동선의 이음매가 강조된다.

영화는 그 동선을 최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사용한다. 실내건 실외건 관계없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들은 감독의 철저한 통제 하에 놓인 세트처럼 느껴진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물을 무조건 따라가기 보다는 자기만의 행로를 고집한다. 만화적이거나 회화적인 요소들이 자주 변주되어 쓰인다. 인물들의 행동, 특히 형사와 범죄자가 육체적으로 맞붙는 장면들은 자주 느린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얼굴도 클로즈업 화면 속에서 과하게 응시된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최대화된다. 이 영화가 범죄의 세계를 그리는 방식은 서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표현주의적인 장면들에 기대서다.

요컨대, 이런 장면들이 있다. 형사와 용의자가 격돌하는 중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 텅 빈 벽에 비치는 그들의 그림자 실루엣을 찍는다. 피 튀기는 몸의 충돌이 아니라, 우아한 그림자극을 구경하는 것 같다. 혹은 이들의 처절하고 힘겨운 몸싸움 위로 왈츠 음악이 깔린다. 어느새 이들은 싸움이 아니라 좀 거칠게 왈츠를 추는 모양새를 연출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간의 관습적인 활극들과 달리 무용이 되고 싶어 하는 액션을 구사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명세 감독이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해 온 화법일 것이다.

당대에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이명세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서사적 빈곤함이 아니라 스타일의 섬세함에 맞춰졌다. 물론 이후 그가 스타일의 실험을 극대화한 ‘형사: Duelist’(2005) ‘M’(2007)에 이르면 서사의 얄팍함과 스타일의 과도함은 비판의 근거가 되곤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다시 보니, 이미 이 영화의 스타일에도 다소 과하게 자기도취적인 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인상과 별개로, 영화의 형식에서 서사적인 물음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따르는 스타일은 형사라는 직업정신을 지극히 영화적인 언어로 구현한 방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형사들이란 어떤 자들인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박중훈이 등장해서 ‘나, 서부서 강력반 영구야’라고 말하기 전까지 누가 깡패이고 누가 형사인지 분별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살인마 장성민이 처음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가 형사의 모습에 더 부합해 보일 정도다. 범죄자의 행색과 더 가까운, 어딘지 불량스러운 우 형사는 형사의 정체성을 간단히 규정한다. “판단은 판사가 하고, 변명은 변호사가 하고, 용서는 목사가 하고, 형사는 무조건 잡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좆 같은 건 순사, 그 중에서도 형사, 그 중에서도 강력반이야.” 그러니까 범죄와 관련해서 가장 우아하지 않은 분야가 강력반 형사의 것이라는 얘기다. 이유를 불문하고 범인은 무조건 잡고 본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원칙이다. 이 맹목성에는 언제나 피로함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마누라한테 사리돈 사러 금방 갔다 올게, 하고 나온 지가 며칠이야”라는 말로 직업의 고단함을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영화 중반에 다소 뜬금없이 나온 한 장면에 의해 그 말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그는 여동생 가족의 저녁식사 자리에 얼룩처럼 끼어 앉아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는 여동생의 말을 통해 그가 결혼한 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마누라와 사리돈(진통제) 운운하던 그의 대사가 초라하고 서글프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단란한 가정의 형상에 속하지 못하는 자, 자신의 온전한 터전을 소유하지 못하는 자, 그 자가 바로 형사인 것이다. 우형사의 모범적인 파트너인 김 형사(장동건)의 경우, 아내와 아이의 존재가 언급은 되지만, 영화 마지막까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맹목적이고 피로하며, 외로운 것이 이 영화가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전달하는 형사의 직업정신이다. 여기에 또 다른 고독함을 덧붙인다면, 그건 형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다. 기차에서 추격이 벌어지던 날, 김 형사는 칼에 찔려 혼수상태가 된다. 마침내 장성민을 체포한 우 형사가 병원을 찾아가 그 입에서는 좀체 나올 것 같지 않던 넋두리를 한다. 범인을 잡은 건 그들인데, 신문에서는 정작 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긴 신문에선 그 새끼들이 주인공이잖아.” 아마도 경찰 간부들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억울함일 테다. 가족도 가질 수 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지만, 세상의 극악함과 몸뚱이 하나로 부딪쳐야 하는 자들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더없이 단순하지만 더없이 동적인 그들의 숙명은 이 영화의 리듬을 그대로 닮아 있다.

이명세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의 첫 아이디어가 텔레비전 다큐 ‘동물의 왕국’을 보던 중 떠올랐다고 말한 적 있다. 사자와 표범의 싸움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은 장면에서 죽고 죽이는 자연의 법칙을 보았고, 거기서 인간 세계의 한 면을 연상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우 형사와 장성민의 대결을 폭우 속에서의 진흙탕 싸움으로 찍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겠다. 선악의 판단은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그러니 서사의 층위들은 필요하지 않다). 쫓고 쫓기는 자의 수평적인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간격에서 긴장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남자가 비오는 폐광에서 마침내 정면으로 마주한 결말부를 보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향해 나란히 주먹을 뻗는다. 영화는 이 싸움에서 어느 한 쪽에 힘의 우위를 두지 않는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가 한 곳에서 뒤엉킬 수밖에 없는 수컷들의 형상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동물적 감각이 어쩌면 이 세계를 추동하는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영상미를 ‘폭력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말은 폭력의 미화와는 결이 좀 다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폭력을 화려하게 장식화하거나 의미화하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폭력의 서사에 들러붙은 수사, 명분, 인과관계 등을 모두 거둬내고자 한다. 감독이 말했듯, 그때 남는 “원초적 움직임만”으로 영화의 활기를 지탱해보려고 한다. 기존의 범죄물들이 ‘폭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만 사로잡혔다면, 이 작품은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더 몰두한 결과물이다. 폭력은 영화의 주제가 아니라 영화적 한계를 실험해보기 위한 소재였다. 한국영화사에서 그 야심을 시종일관 이토록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범죄물은 없었다.

■이명세 감독… 만화적 상상력, 현실과 환상 경계 등 활용해 독특한 형식미 구축

1957년에 태어난 이명세(사진)는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에는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고래사냥'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등을 함께했다. 그리고 1988년 '개그맨'을 만들며 데뷔작부터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독특한 영화관을 강렬하게 펼쳐냈다. 영화에 대한 꿈을 간직한 변두리 인생들의 이야기로 배창호 감독이 안성기 황신혜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꿈'의 성질에 대한 매혹은 이때부터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좀 더 대중적인 화법으로 박중훈 최진실을 기용해서 만든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김혜수를 청초한 여대생으로 등장시킨 '첫사랑'(1993)에서도 이명세의 시각적 실험은 이어졌다. 인공적인 세트, 만화적인 상상력, 아련하면서도 초현실적인 낭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 등을 적극 활용하며 이명세만의 형식미를 구축해갔다.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블랙코미디로 푼 '남자는 괴로워'(1995)는 무성영화적인 움직임을 구현해보려는 시도였다. '지독한 사랑'(1996)에서는 강수연과 김갑수를 연인으로 출연시켜서 '남자는 괴로워'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멜로를 완성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의 여섯 번째 장편이자 첫 번째 범죄액션 영화로 제20회 청룡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두문불출하다가 2005년 강동원 주연의 '형사: Duelist'로 복귀했고 2007년 다시 강동원과 함께 'M'을 선보였다. 두 영화는 이명세식 스타일의 정수라는 호평과 서사적 빈곤함의 산물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으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