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욕망


 
영화 ‘쉬리’의 한 장면. 두 주인공 유중원(왼쪽)과 박무영(오른쪽)이 대치하고 있다. 영화사 제공
 
제주도 서귀포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 맥락상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훗날 이 영화를 대표하는 유명 촬영지가 됐다. 영화사 제공
 
‘쉬리’의 메인 포스터. 영화사 제공
 
강제규 감독


“유사 할리우드 영화로 오리지널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실용주의 전략.” “액션과 미스터리, 멜로를 알맞게 배합한 흥행폭탄.” “한국 관객만 보기는 아까운 감성첩보영화.” “상업주의 전략을 완성시킬 줄 아는 장인들의 영화.”

영화 ‘쉬리’가 개봉하자 쏟아져 나온 전문 평자들의 한줄평들이다. 이 말들은 당시에 ‘쉬리’가 어떤 영화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이렇게 합체해보면 전모가 드러난다.

‘액션과 미스터리와 멜로를 알맞게 배합한 흥행폭탄으로서의 쉬리는 상업주의의 전략을 완성시킬 줄 아는 장인들의 영화로서 유사 할리우드 영화로 오리지널 할리우드 영화를 이기는 실용주의 전략을 갖춘 결과 한국 관객만 보기는 아까운 감성첩보영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쉬리’는 당대 한국영화가 성취한 최첨단의 산업적 모델로 각광받았다.

이 담론에는 확실히 시대적 강박이 엿보인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집단 최면현상이라고도 꼬집었다. 특히나 ‘할리우드 영화를 이긴다’거나 ‘한국 관객만 보기는 아깝다’는 표현 속에는 말 그대로 ‘세계화’라는 측면에만 맞추어 영화를 평가하고 칭송하는 논리가 팽배해 있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겁니다”라는 당대 유행어와 이 담론은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유명 코미디언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심형래가 그 말의 주인공이었다. 1999년에 그는 국정홍보처가 지정하는 신지식인 1호에 선정되어 외환위기 국난을 벗어나는 자수성가형 산업역군이자 세계화의 대표적 기수로 제시되었다.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이 아니라 영화를 통한 수출 증대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그의 영화는 괴수 장르 ‘용가리’였다.

자동차 몇 대를 더 파는 것보다 영화 한 편을 잘 파는 것이 훨씬 더 산업적 이득을 낳는다는 셈법도 이즈음부터 통용됐다. 심형래 본인은 혹은 그의 산업적 성공신화를 믿었던 이들은, ‘용가리’를 비판하는 것은 곧 세계화를 꿈꾸는 한국영화의 용기 있는 시도와 응전 자체를 매도하는 것과 같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심지어 그런 분위기는 2007년 작 ‘디 워’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전부 거품이었다는 게 완전히 입증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했다.

물론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던 ‘용가리’와는 다르게 ‘쉬리’는 산업의 측면에서 확실히 희대의 성공작이었다.

당시까지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서편제’의 기록(서울관객 103만명)을 가뿐히 넘어섰을 뿐 아니라 역대 한국 개봉작 중 최고 흥행작이었던 ‘타이타닉’의 기록(서울관객 197만명)도 따돌렸다. 서울관객 100만을 기준으로 흥행 대작 꼬리표가 붙던 그때에 서울관객 240만, 전국관객 500만을 넘게 모았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가로 일본에 팔려 흥행도 했다. 한마디로 ‘쉬리’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판’을 단번에 키워놓는 역할을 했다. 그러자 ‘쉬리’를 뛰어 넘는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 흥행 대작들이 연이어 나왔고 마침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영화 1000만 관객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

다만 지금의 관객으로서 ‘쉬리’를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지나치게 느슨하다. 당시에도 우리의 자부심에 걸맞을 정도의 최상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문화적·산업적 모델의 시초로서 기억되고 소환되는 것 정도가 적합할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처음 표방했던 것은 ‘퇴마록’이었지만 그 용어의 전략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것은 ‘쉬리’였다.

도시 어딘가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정부의 요원들은 혹은 우리의 영웅들은 촌각을 다투며 그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뛰어 다니고 악당은 유능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잔혹하다. 그리고 도심에서는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쉬리’가 할리우드 영화의 이러한 골자를 흉내 내고 되풀이한다는 걸 모르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우리의 인물과 모국어와 기술을 통해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많은 관객을 흥분시켰다.

내용을 보자. ‘쉬리’의 주인공은 정부의 비밀 요원 유중원(한석규)이다. 그는 수족관을 운영하는 이명현(김윤진)과 연인 관계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이명현이 아니다. 사실은 유중원이 수년째 쫓고 있는 여간첩 이방희다. 유중원은 그걸 알지 못한다. 유중원과 그의 동료 이장길(송강호)은 매번 이방희의 방해 때문에 제보자를 잃는 곤경에 처한다. 그즈음 박무영(최민식)이 이끄는 북한의 특수 부대원들이 남한으로 침투해 온다. 신소재 액체 폭탄 CTX를 탈취한 박무영 일당은 서울 주요 지역에 폭탄을 설치하고 당국을 위협한다. 유중원과 박무영은 2002년 월드컵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친선 축구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유중원은 이방희와 운명적인 대면을 하게 된다.

‘쉬리’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실천하기 위해 이곳의 국가적·지역적·민족적 특수성을 전제한다. 이른바 분단서사를 기초로 한 분단영화를 제재로 삼았다. 물론 ‘쉬리’ 이전의 한국영화사에도 분단영화는 많았으나 장르적 활성화 자체가 목적인 경우에도(가령 전쟁물) 결국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의무적으로 공표하지 않으면 안 됐던 과거와는 다르게 ‘쉬리’는 철저하게 장르적 활성화를 앞세우며 국가적·지역적·민족적 상황들을 활용하는 드문 예를 선보였다.

분단서사와 분단영화가 한국의 대중영화 속에서 스릴러 첩보 코미디 등 각종 장르물로 본격적으로 분화되어 나아가려 하던 그 시점에 ‘쉬리’는 일정한 초기 모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가령 ‘쉬리’와 같은 연도인 1999년에 제작된 영화 ‘간첩 리철진’에는 북에서 남파되었으나 남쪽의 택시강도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졸지에 표류자 신세가 되어 버리는 다소 어리숙한 간첩이 등장한다. 전에 없이 무능하고 헐렁한 간첩 유형의 등장이고, 이 영화의 경우라면 코미디가 주목적이었다. ‘쉬리’에도 다소 생소한 인물 유형이 등장한다. 북의 특수요원 박무영이다. 여기서 박무영은 북쪽에서 온 ‘악인’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신념과 고고한 명예율을 지닌 무시할 수 없는‘적’에 가깝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인물 유형을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남파된 북의 요원이 이렇게 유능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그리고 어떤 저항감 없이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생소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심지어 박무영은 서울의 흥청망청하는 밤거리를 바라보며 유중원에게 따끔한 일침까지 던진다. 관객 중 혹자는 남쪽의 유중원이 아니라 북쪽의 박무영에게 더 매력을 느꼈을 법도 하다.

사실 기본적인 설정으로만 따지자면 ‘쉬리’는 한형모가 만든 1958년 작 ‘운명의 손’(이 지면의 첫 회에 이 영화를 다뤘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북쪽의 여간첩과 남쪽의 요원 사이의 모순된 사랑과 비운의 결말. 그런데 큰 차이가 한 가지 있다. ‘운명의 손’에서 여주인공은 그녀를 조종하는 상급자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 한다. ‘쉬리’에서는 남북한의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그 스타디움에서 유중원과 이방희가 대치할 때 유중원이 결국 이방희를 자신의 총으로 사살한다. 분단의 슬픈 역사가 개인들의 비극적 참상으로 발현되고야 마는 참혹한 순간이라는 점에서라면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두 영화가 모두 중시하는 멜로드라마적 정서 위에서 보자면 마침내 ‘운명의 손’은 주인공이 연인을 잃는 것이고 ‘쉬리’는 주인공이 연인을 처단하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더 강고해보일 수 있는 ‘쉬리’의 이 선택은 사실 사상적 선택이 아니라 철저하게 장르적 선택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한 축은 알려진 것처럼 또 하나의 강고한 멜로드라마였던 셈이다.

‘쉬리’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영화들이 2000년대 초에 쏟아져 나왔지만 상당수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는 점점 쇠약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용어가 쇠약해졌을 뿐 그 전략은 오히려 암암리에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욕망은 한국 대중영화계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강제규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 1000만 흥행작 남겨

강제규(56·사진) 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했고 합동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장미의 나날’ ‘게임의 법칙’ 등에 각본가로 참여했다.

장편감독 데뷔작은 ‘은행나무 침대’인데, 이 영화는 개봉 직후 큰 화제를 낳았다. 한국식 혹은 중국식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되 멜로드라마를 가미하고 각종 특수효과 기술을 동원하여 적잖은 관객들의 흥미를 끌었다. 1998년에는 자신의 제작사인 강제규 필름을 창립, ‘쉬리’로 일종의 산업적 대전환을 이루게 되고 한국 영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제규 감독은 뒤이어 기획 및 제작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단적비연수-은행나무 침대 2’ ‘베사메무쵸’ 등을 기획 제작했다. 하지만 그의 행보는 여전히 자신이 모델을 세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진일보에 있었다. 그 결과가 2004년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다. 이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영화 1000만 관객을 넘긴 흥행 대작이 되었으며 당시로서는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작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그럼에도 강 감독은 더 나아가길 원했다. 오랜 준비 기간 끝에, 그리고 300억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투여하여,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와 판빙빙이라는 한중일의 유명배우 세 명을 주연으로 내세워, 또 한편의 전쟁 대작을 내놓는다. 하지만 ‘마이웨이’의 결과는 참담했다. 영화는 부실했고 관객의 발걸음은 적었다. 이 대작의 실패 이후에 강 감독에 대한 각종 루머가 떠돌았을 정도다. 이후 강 감독은 작은 규모의 가족영화인 ‘장수상회’로 복귀했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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