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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마음 약해도 괜찮아





상담을 받아서 여린 마음을 고치고 멘털 강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이가 종종 찾아오는데 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마음 여린 게 문제는 아니에요.” 누군가는 실없는 조언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지만 “저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커피잔이에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냉면그릇이 될 순 없어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밤새도록 도를 닦고 마음을 수련해도 커피잔 같은 마음이 냉면그릇이 될 수는 없어요. 그나마 소주잔 아닌 게 다행이라고 여기고 사세요.” 짐작하겠지만 이 말 속에는 여러 의미가 녹아 있다. 유리잔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쇠그릇이 될 수 없듯 우리 마음의 본질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부질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마음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 조언처럼 하는 말이지만, 이건 어쩌면 마음 여린 나를 위한 다독임이기도 하다.

문득 나 자신이 정신과 의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나처럼 마음그릇이 작고 약한 이가 사람들의 불안과 우울을 담아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다. 지금까지 의사 노릇은 어떻게 했느냐고 다그쳐 묻는다면 우물쭈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주문을 건다. “마음 약해도 괜찮아”라고.

나조차 다 따라하지 못 하는 조언들이 담겨 있는 책을 내고 나면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들춰보기가 싫다. 완벽한 사람만 책을 쓰는 건 아니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내 글을 보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도 누군가가 “당신이 쓴 글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답한다. “멀리 보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자신을 탓할 필요 없다. 인간은 어차피 모두 불량품이다. 나이가 든다고 불량이 고쳐지는 법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 말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오랫동안 갖가지 감정들을 나눠온 내담자들을 위한 것이면서 나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약해빠진 마음을 부여잡고 살고 있다. 고민이 쌓일 때마다,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담담하게 다 안고 갈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여전히 얇은 마음 찢어지지 않게 보듬어가며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다.

마음이 강철이면 꽃길 같은 인생을 살게 될까? 그렇지도 않을 거다. 이십년 가까이 정신과 의사로 살면서 “나는 정말 낙천적인 사람인데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날카로운 화살로 마음이 난도질당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죽고 싶어요”라며 눈물 흘리는 모습도 수없이 봤다. 아무리 쇠로 만든 마음이라도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에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는 걸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마음은 여리고 약한 것이 정상이다. 우리가 얼기설기 모여 사는 것도 원래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한 사람이 부러지기 쉽고, 다치면 더 크게 아파한다. 마음은 약하기 때문에 더 강해질 수도 있는 법. 약하기 때문에 굽힐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다. 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마음그릇도 그나마 조금 더 커진다.

그래도 여리고 약한 마음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사람을 금방 믿고 친해졌다 싶으면 속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고 나면 번번이 손해를 보게 된다. 여린 마음을 들키고 나면 만만한 사람 취급당한다는 걸 몇 번의 큰 뒤통수를 맞은 뒤에야 깨달았다. 여린 성격을 고치고자 했던 사람들의 동기도 “더 이상 당하고만 살 수 없어”라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약한 본성을 드러내면 이내 다치고 마니까 강함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강한 멘털의 소유자는 마음 아플 일이 없을 거라고 기대했을 테고.

마음이 약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약한 사람이란 걸 들켰을 때 득달하고 달려드는 세상의 야박함이 문제다. 여린 마음은 문제가 아닌데도 팍팍한 세상을 살다 보니 애꿎게 자기 마음을 탓했던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음 약해지지 마”라고 조언하기보다 “약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사는 데 별 문제는 없지만, 자기 속을 다 보이고 살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바라는 건, 여리고 약한 마음 솔직히 드러내도 별일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고. 이런 세상은 언제쯤 찾아올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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