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청춘리포트] 만화 ‘덕후’, 무작정 미국으로… 가능성 알아본 블리자드

블리자드 콘셉트 아티스트 박예원씨. 이 팀에 20대 한국인 여성이 신입으로 들어간 것은 블리자드 역사상 최초다. 아래는 블리자드 오버워치의 인기 캐릭터 솜브라. 박예원씨는 솜브라 개별 스토리 영상 작업에 참여했다. 곽경근 선임기자, 블리자드 제공
 
예원씨의 학생시절 습작 두 점.박예원 제공


오버워치 캐릭터 '솜브라' 개발한 박예원 블리자드 콘셉트 아티스트

만화 적성 살려 애니메이션과 진학했지만
새 꿈 찾아 캘리포니아주 아트센터行 결단
졸업 무렵 낸 포트폴리오 기업 인턴서 고배
학교에 갇혔던 틀 벗고 나만의 작업물 만들자
드림웍스 등 유명 애니 회사 3곳서 일할 기회

최종 선택한 블리자드서 게임 스토리 영상 담당
캐릭터를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로 부각시키려
한 편의 단편영화처럼 만들어 게이머들과 소통


현란한 총격 영상 가운데 보랏빛 머리를 멋지게 넘긴 멕시코계 여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편 애니메이션이지만 한 편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한다. 블리자드의 인기게임 오버워치의 캐릭터 중 하나인 솜브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상이다. 그는 악명 높은 해커 출신으로 '열 광학 위장술'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든 뒤 적의 배후로 숨어들어가 공격한다. 해커 출신답게 인터넷 기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매력에 빠져있다 보면 6분짜리 영상이 어느새 끝나 있다. 오버워치의 23번째 영웅 솜브라는 등장하자마자 국내 유저들이 사랑하는 캐릭터 상위권에 등극했다. 캐릭터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이 영상 뒤에는 한국인 출신 콘셉트 아티스트 박예원(27·여)씨가 있다. 그는 2016년 블리자드 크리에이티브 디벨롭먼트(Creative Development)팀 직원이 됐다. 이 팀에 20대 한국인 여성이 경력도 아닌 신입으로 들어간 것은 블리자드 역사상 최초다.

만화 덕후, 무작정 미국으로

지난 3일 서울 이촌동에서 예원씨를 만났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블리자드 크리에이티브 디벨롭먼트팀에서 1년 반 동안 정신없는 신입 생활을 보내고 한국의 가족과 연말연시를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 직접 만난 그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예원씨는 일본 만화 나루토와 도라에몽, 미국 픽사 애니메이션에 빠진 만화 ‘덕후’였다.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사는 그를 보고 부모님이 먼저 “차라리 만화를 직접 그려보면 어떻겠느냐”고 할 정도였다.

대학도 애니메이션 관련 전공을 선택해 호서대 애니메이션과에 진학했다. 원하던 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새로운 꿈이 생겼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같은 과 4학년 멘토 선배가 그의 꿈에 불을 붙였다. 멘토 선배는 그에게 “애니메이션산업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꼭 한번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재면서 미루다 졸업을 앞두게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예원씨는 “언니의 말 한 마디가 나를 미국으로 가게 만들었다”며 “많은 고민을 했다기보다 그냥 그 시절 내 마음의 소리에 따라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예원씨는 대학을 그만두고 3∼4개월간 작업물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2011년 9월 캘리포니아주 아트센터(ArtCenter College of Design)에 합격했다. 영어 대화도 안 되는 상태에서 합격증을 받았다. 4학기를 다니는 동안 기초디자인 수업을 들은 뒤 ‘엔터테인먼트 아트’를 전공했다. 학교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수업 외에 다양한 강좌를 들었지만 그는 결국 어린 시절 꿈이었던 애니메이션 분야를 선택했다.

모든 것을 버린 새로운 출발

졸업을 앞두고는 좌절을 겪었다. 학교에서 만든 작업물들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미국 기업의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했지만 모조리 떨어졌다. 학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업물이었지만 기업체의 반응은 냉담했다. 예원씨는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헛수고가 된 것 같아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말했다.

결국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혼자 준비해보자고 결심했다. 예원씨는 “학교에서 만들었던 작업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나만의 작업물을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그 뒤로 1차, 2차 심사를 통과하고 인턴으로 합격한 곳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래도 학교에서 함께 준비하면 은연중에 학교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이나 틀에 갇혀 비슷한 작업물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며 “학교에서는 방법만 알려준 것이고 결국 응용은 내 몫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예원씨는 유명 애니메이션 회사 드림웍스를 포함해 총 3개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디즈니-픽사 드림웍스 등 정통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기에 드림웍스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는 꿈을 이룬 것 같아 행복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터가 게임 회사에?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게임 회사인 블리자드였다. 전 세계에 온라인 게임 열풍을 몰고 온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같은 게임을 만든 초대형 게임 회사다.

예원씨는 우연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신의 창작물을 올렸다가 작품을 본 블리자드 관계자에게 면접 제의를 받았다. 예원씨는 “초등학교 때 스타크래프트를 즐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게임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블리자드에 들어간 이유는 게임 분야에서도 충분히 예술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임 회사지만 블리자드에서도 애니메이터는 핵심 인재다. 예원씨가 소속된 CD팀은 게임 홍보용 영상과 게임 내부 스토리 영상을 만든다. 게임 속 캐릭터와 배경, 음악을 활용해 수십 편의 단편 영화를 만든다고 이해하면 쉽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화면 배경과 소품을 디자인하고 색조와 분위기 등을 정해 게임 속 세계를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공간과 인물로 만들어낸다.

그는 “오랫동안 내 작품에 자신을 갖지 못해 작업물을 나만의 공간에 간직했다”며 “창피한 마음도 있었고 부정적 평가로 상처받는 일도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연히 인터넷에 올린 작업물은 그에게 기회를 가져다줬다.

예원씨는 “스스로 보기에 자신의 작품에 허점이 많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며 “블리자드에 취업하면서 누군가에게 내 작품을 보여주는 일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어 한두 작품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블리자드는 예원씨와 같은 애니메이터를 한 명의 예술가로 대우한다. 요즘 온라인 게임은 단순한 오락의 수준을 넘어 자신만의 세계관과 역사를 갖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게임 회사들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블리자드의 예술가들은 회사의 지지 아래 게임 속 캐릭터들을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닌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들어낸다. 예원씨의 손길로 캐릭터에 부여된 개성과 스토리가 생생하게 살아나야 게이머들이 깊숙이 몰입할 수 있다.

그는 “블리자드에서 면접을 제의했을 때 애니메이션 관련 일자리였기에 응했다”며 “블리자드의 인기 게임 6개는 게임마다 스타일이 달라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블리자드의 인기 게임 하스스톤과 오버워치,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영상 작업에 참여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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