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2018년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作 '야나이하라 이사쿠 흉상(석고원본,1961)'


세밑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국민일보 창간 30주년 기념전)에 다녀왔다. 모처럼 만의 문화적 호사는 우리 삶에서 본질을 추구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하게 했다. 지쳤던 마음이 정화되고 새해맞이가 넉넉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코메티(1901∼66)는 20세기 최고의 조각가로 평가된다. 입체파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자코메티를 만났을 때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시기할 정도였다니 더 이상의 설명은 무의미하다. 인체를 위아래로 길게 늘려 10등신 이상으로 표현한 그의 조각들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지워나가는 사상(捨象)의 결과물이다.

사람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형상을 찾는 행위이자 동시에 지우는 일이었다. 남는 것은 본질로서 인간의 시선이며,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시선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는 자코메티와 깊이 소통했던 벗 일본인 철학자 야나이하라 이사쿠(矢內原伊作, 1918∼89)의 증언이다.

이사쿠는 54∼56년 프랑스 유학 중 자코메티와 교류했는데 귀국 직전 자코메티의 모델이 된다. 자코메티가 귀국선물로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사쿠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사쿠는 귀국 후에도 61년까지 거의 매년 여름 그의 모델이 됐고 그 과정에서 본 자코메티를 치밀하게 기록했다.

자코메티의 생각과 작업 방식,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 등이 이사쿠가 쓴 ‘자코메티와 함께’(69)를 통해 자세히 소개됐다. 이사쿠의 유고집 ‘자코메티’(96), 이사쿠가 소장했던 자코메티 관련 자료를 모두 묶어낸 ‘완본 자코메티 수첩’(전 2권, 2010) 등은 이제 자코메티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그런데 이사쿠는 대체 왜 그리 꼼꼼하게 자코메티를 기록했을까.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남다른 예술적 감수성을 갖췄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의 아버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는 일본의 기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로 무교회주의의 지도자였다. 그는 장남인 이사쿠의 이름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Isaac)에서 따왔을 정도로 독실했다.

다다오는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임하던 37년 ‘중앙공론’에 실은 에세이 ‘국가의 이상’ 탓에 대학에서 쫓겨났다. 당시 일본의 침략적 행보에 대해 ‘국가의 이상’이란 잣대로 따져볼 때 옳지 않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45년 패전 이후 그는 복직해 도쿄대 총장에 선출됐는데 오늘날 일본에서 대학의 자율과 학문의 자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사쿠가 아버지의 신앙을 어떻게 이어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가 ‘다다오 평전’을 잡지에 연재한 것으로 보아 어떤 행태로든 아버지를 계승했다고 본다. 이사쿠는 평전 첫 대목에 “그(다다오)가 진리를 위해 싸워온 싸움을 우리도 이어가기 위해 기록한다”고 썼다. 이사쿠에게 그 싸움은 무엇이었을까. 삶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노력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조각가 자코메티에게는 뭔가 다른 시선으로 받아들여졌을 터다.

실제로 56년 10월 2일 이사쿠가 귀국을 6일 남겨놓고 자코메티의 모델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코메티는 깊은 충격과 더불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그것은 시선, 시선 저 건너에 있는 본질을 찾는 고투였다. ‘자코메티와 함께’에 따르면 연일 이어지는 데생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자 자코메티는 생각대로 그려지지 않는다고 오열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이사쿠는 귀국을 늦췄고 데생은 그해 1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이사쿠는 56∼61년 총 228일 모델을 섰는데 그와 관련된 자코메티 작품은 10여개뿐이다. 그만큼 치열하게 지우고는 그리고, 형상을 만들고는 다시 부수는 일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자코메티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걸어가는 사람’(60), ‘앉아 있는 남자(로타르 좌상)’(65∼66) 등은 이사쿠와 고투한 끝에 구축한 자코메티 시선의 결과가 아닐까. 이사쿠의 시선 속에서 자코메티의 고뇌를 떠올리다 보면 앞을 향해 막 걸음을 떼는 ‘걸어가는 남자’의 시선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2018년 새해 아침, 우리는 각각 어떤 시선을 구축할 것인가. 그 시선이 가야 할 곳, 멈춰 서야 할 곳은 어디일까.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이런저런 모습으로 산적한 문제들의 겉모습에 주눅들 건 없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시선이 우선 필요하다. 제대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꿈을 꾸고 비전을 볼 때 마침내 미래는 열리는 것이니.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