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서울로부터 18.23㎞… 신도시의 ‘슬픈 이면’


 
①영화 ‘초록물고기’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막동이 집의 정경.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저 버드나무가 인상적이다. ②일명 ‘유령역’인 대곡역 표지판 앞에 서 있는 막동이. 이창동 감독은 자신이 일산 신도시 시민으로 살게 되면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③배태곤의 명령으로 살인을 저지른 뒤 두려움에 떨며 가족에게 전화하는 막동이. 이창동 감독은 ‘초록 물고기’를 ‘필름 누아르’ 장르라고 설명했다. 필름 누아르는 도시와 파멸하는 남자, 파괴적인 여자 등으로 만들어지는 장르다. 필자 제공
 
이창동 감독


‘초록물고기’(1997)의 막동이(한석규)는 이제 막 전역한 26살 청년이다. 배운 것도 특별한 기술도 없지만 돈을 벌어 집안의 가계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만은 단단하다. 일산의 고향집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나이트클럽 여가수 미애(심혜진)를 치한들로부터 구해준다. 이를 계기로 그녀의 정부(情夫)인 영등포 조직 우두머리 배태곤(문성근)과 끈이 닿게 된 막동이는 그의 수하로 들어간다. 하지만 막동이의 삶은 불운하고 짧다. 그는 배태곤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오히려 배태곤에게 살해되고 만다. ‘초록물고기’를 처음 보았을 때 막동이의 이 짧고 허망한 생의 이야기는 강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했던 것을 꼽자면 막동이의 고향집 안마당에 있는 저 버드나무의 줄기찬 흔들림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흐려지곤 하던 훗날까지도 버드나무의 흔들림은 내내 잊히지 않았다.

“멀리 들판 너머로 일산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고, 그 그림 같은 아파트들과는 대조적으로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집,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늙은 버드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감독이 영화의 촬영일지에 막동이의 집에 관하여 묘사해 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나무가 바로 이 영화를 있게 한 단상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 알게 됐다.

그 버드나무는 영화 속에서 몇 차례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한다. 나무는 가족들의 연원을 제시하는 도입부의 사진에 우선 담겨 있다. 막동이의 가족들이 아침을 여는 일상적 풍경 안에도 여지없이 들어 있다. 방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제는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 올 터이니 파출부 일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막동이가 어머니에게 말할 때에도 버드나무는 창문 밖에서 마치 막동이의 그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일렁인다. 미래에 관하여 막동이가 금전적 선언과 다짐을 할 때에, 즉 자신의 꿈에 관하여 말할 때에, 거기 바로 그 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막동이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깡패 조직의 우두머리 배태곤을 처음 만나고 돌아온 날 밤, 막동이의 불운한 운명이 시작되던 바로 그 날 밤, 잠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난 막동이와 그 가족들의 전신 위로 일렁이던 버드나무의 그림자와 창밖의 실물은 막동이의 불운한 운명에 관한 근심이자 예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버드나무는 왜 이토록 강고한 인상으로 반복 등장하는 것인가. 대답을 찾자면 이것이 이 대지 위에서 그 무엇보다도 오래 생존해 있었던 사물이자 시선이자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버드나무는 이곳의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오래된 것들을 밀어내고 들어선 새로운 것들, 신도시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산본 중동 평촌 분당 그리고 막동이가 살고 있던 일산에 신도시가 세워졌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인접한 새로운 도시 지구였다. 신도시 건설은 1988년 포화된 서울의 인구 밀도와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내놓은 주택 보급화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여기에는 새로운 중산층의 모델이 집적되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이 내놓은 슬로건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에서 그 보통사람들이란 하층민의 중산층적 욕망을 겨냥한 말이었다.

뜯어보면 신도시 건설은 “조국 근대화”의 강령이 이어지는 기형적 도시 개발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곳으로 들어와 새로운 중산층으로 가입되지만 누군가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이주민이 되어야만 했다. 어떤 원주민들은 그 도시형성의 위세 때문에 별 수 없이 떠밀려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막동이와 그의 가족들이 그러했다. 물론 막동이를 제외하곤 그의 가족들조차 이 변화에 그다지 민감하진 않아 보인다. “동네가 신도시 때문에 팍 찌그러졌다”고 불평을 해도, “여기가 전에 우리 땅이 아니었냐. 전에는 아카시아 나무 천지였다”며 추억을 되묻는다 해도, 막동이의 그 말을 듣는 작은 형은 “그 전엔 별 게 있었냐”고 퉁명스럽게 응수하거나 생업에 매진하느라 제대로 답조차 하지 않는다. ‘초록물고기’는 일산 신도시 형성이라는 도시 개발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영화이지만 우린 막동이를 따라갈 때에야만 그 점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 전역하여 집에 돌아오는 막동이를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가 일산 신도시라는 도시 형성의 지역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막동이는 지하철 3호선 대곡역에 내린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은 오가는 인적이 흐릿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유령역으로 불리던 곳이다. 3번 출구와 4번 출구의 갈림길에서 막동이는 잠시 서서 표지판을 응시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집으로 가기 위해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전철역을 빠져 나오면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도로 너머의 신도시 아파트 숲을 보여주고 막동이의 걸음을 따라 그 반대방향으로 이동하여 철길과 그 옆에서 싸우는 사람을 지나 집으로 가는 막동이의 뒷모습을 비춘다. 신도시의 숲은 저 멀리 버티고 있고 막동이의 집은 그 반대로 향해 가야 있다.

막동이의 이 귀향길은 한국영화사의 반복되어 온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울역에 도착하는 저 수많은 상경자들의 상경길이다. 소년이 짐 보따리를 도둑맞고, 소녀가 매매춘의 검은 손들에 이끌려 가는 그 곳, 너무 많은 인파와 생경한 풍경이 주인공의 정신을 쏙 빼놓던 그 곳. 그렇게 서울이란 도시는 포화상태가 되었다. 막동이의 눈앞에 그런 인파나 광경이 부재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건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생경한 도시 환경을 마주한 그의 어리둥절함의 강도다.

과거 시골의 소년과 소녀에게 서울역의 인파와 거대 건물이 어리둥절함을 건넸다면, 막동이에게는 현대화되었으나 지나치게 고요한 대곡역의 주변과 텅 빈 통로 혹은 그것을 빠져 나오자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 숲과 같은 것이 그 어리둥절함을 건넨다. 썰렁한 대곡역에 도착하여 낯선 표지판 아래에서 어디로 가야 우리 집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는 (혹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막동이의 뒷모습은 서울역에 도착하여 어디로 발길을 향해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던 수많은 한국영화사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서울로의 ‘상경’과 서울로부터의 ‘분산’이라는 역사적 인과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렇게 물어도 좋다. 1960∼70년대의 한국영화 속 인물들은 서울로 진입하여 결국 무엇이 되었던가. 한국영화는 그 상경자들의 직업을 아주 오랫동안 무엇으로 그려냈던 것인가. ‘식모’ ‘버스 안내원’ ‘호스티스’가 되어갔던 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막동이의 길 역시 다르지 않다. 왜 ‘초록물고기’의 주인공은 실패하는 하층민 깡패로 상정된 것인가. 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일산 신도시의 중산층 입주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인가. 과거의 상경자들이 서울로 진입하여 갖은 고초 끝에 몇몇은 비극적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막동이라는 귀향자는 서울 인근 지방의 자신의 고향에서조차 그 바깥으로 밀려나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도시로 온 과거의 숱한 식모와 버스 안내원과 호스티스들과 신도시로부터 밀려난 깡패 막동이는 결코 다르지 않다.

1990년대 한국영화에서 깡패란 일면 도시 생활의 실패자들이자 추락자들의 주요 모델이 되기도 했다. 순수함을 마음 깊이 담아 둔 인물일수록 실패와 추락에의 폭락은 더 컸다. 한국영화에서 깡패가 도시화의 형성과 영향에 있어 이처럼 주요하게 정서적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배태곤의 꿈의 실현과 막동이의 꿈의 좌절은 아마 그런 점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배태곤은 막동이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두 차례나 묻지만 그는 막동이의 꿈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막동이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배태곤의 꿈은 재개발 지구에 야욕과 범죄로 얼룩진 새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마침내 배태곤의 그 꿈은 가족과 모여 살며 조그만 식당을 하고 싶다는 막동이의 꿈을 먹어 치우고 나서야 이뤄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배태곤조차 서울의 중심이 아니라 일산 신도시의 주민으로 편입된다는 이 영화의 마지막 설정이다. 시간이 흘러 일산 신도시의 새로운 도시민이 된 배태곤이 막동이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을 때, 거기 막동이는 없고 막동이를 제외한 가족들과 버드나무만이 겨우 살고 있다. 우리는 묻게 된다. 배태곤이 먹는 토종닭은 단지 닭인 것인가 막동이의 또 다른 분신인 것인가. 이 신도시는 누군가의 찌그러진 꿈 위에서 혹은 모종의 포식으로 건설된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으로 영화 장인의 자리에 올라

이창동(사진) 감독은 1954년에 태어났다. 경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와 국어교사로 재직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전리’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1992) 등 소설가로 활동했으나 점점 더 영화에 관한 관심이 커져갔다.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각본 및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영화 연출 실력을 쌓아갔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6)에도 각본으로 참여했다.

감독 입문작 ‘초록물고기’를 만들어 큰 화제를 낳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연출작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는 이창동 영화 예술의 도약을 마련했다.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밀양’(2007)으로 이창동은 완전한 영화 장인의 자리에 오른다. 전도연이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이창동은 세계 영화계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이후 ‘시’(2010)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밀양’과 함께 이창동 영화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쓴 바 있고 참여정부 당시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영화 기획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두 번째 사랑’(2007) ‘여행자’(2009) ‘도희야’(2009) ‘우리들’(2015) 등에 제작 기획자로 참여하며 신진들을 양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근 7년여 만에 신작 제작 계획을 발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장편영화 ‘버닝’이다.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 등이 출연한다.

글=정한석 영화평론가,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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