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조선인 대학살] 침묵했던 94년의 恨… 진상규명 첫걸음

1923년 관동대학살 당시 자경단에 소속된 일본 민간인 2명이 누워 있는 조선인에게 죽창을 겨누고 있다.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교 명예교수 제공




"할아버지를 비롯해 형제 다섯 분이 일본 도쿄의 경찰서에서 피살됐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손자인 제가 진상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30일 부산 대연동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일본 관동(關東·간토)대학살 희생자 조묘송(당시 32세)씨의 손자 조영균(62)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취재진에게 말했다. 조씨의 할아버지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도쿄 고토구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일본군의 총칼에 숨졌다.

94년 전 일어난 관동대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유족들이 나섰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희생자 유족회’는 이날 발족식을 갖고 정식 출범했다. 관동대학살 관련 유족회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족회에는 조씨 등 당시 희생자 자손 7명이 이름을 올렸다. 관동대학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온 재일동포 2세 오충공(62) 감독과 시민단체도 참여했다.

유족회는 한·일 정부에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할 계획이다. 희생자 유족 조사와 유골 봉환, 피해 보상을 위한 운동도 진행할 계획이다. 오 감독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한국 정부가 관동대학살의 희생자 유가족이 누구인지 단 한 명도 명확하게 발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구마모토 지진의 헤이트스피치를 용서 안 하는 모임’의 마쓰오카 세즈코(65·여) 대표는 “일본은 학살 사건에 대해 해명을 하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고 있다”며 “일본인으로서 희생자분들에게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관동대학살은 일본인들이 대지진 당시 조선인 6600여명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관동지역에 진도 7.9∼8.4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에 이은 화재와 엄청난 피해에 놀란 일본 정부는 엉뚱하게 조선인을 적으로 몰았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갔다. 일본군과 경찰이 조선인을 마구 잡아들였다. 민간인들도 죽창을 들고 다니며 조선인을 죽였다.

94년이 지나도록 관동대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5월 12일 최고의사결정회의인 각의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국내에서는 진상 규명 노력이 정부보다 민간 차원에서 이뤄져왔다. 관동대학살 사건을 국내에 처음 알린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었다.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지 석 달 뒤인 1923년 12월 독립신문은 일본 유학생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관동대학살로 희생된 조선인 수가 6661명이라고 보도했다.

독립신문 보도 후 일제 치하에선 관동대학살 사건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게 금지됐다. 광복 후에도 한 동안 잊혀졌다가 1973년 함석헌 선생이 잡지 ‘씨알의 소리’에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면서 다시 주목 받았다. 함 선생은 이 글에서 “관동대진재의 원흉은 누구냐? 지진 화재가 아닙니다. 그 핵심은 조선인 학살에 있습니다.… 문제는 국가주의입니다. 그것이 동양평화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을 먹었고 혁명을 막기 위해 조센징을 제물로 잡았습니다”라고 썼다.

진상규명을 위한 단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때는 2007년이다. 2007년 진상규명을 위한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가 출범했다. 1923연대는 매년 학살 현장을 찾아 기록과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허경구 윤성민 기자 ni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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