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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들 초록 그늘 속 보랏빛‘유혹’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이천변 ‘성밖숲’을 찾은 여행객이 호젓한 숲길을 걸어가고 있다. 8월 성밖숲은 초록 이끼를 두른 아름드리 왕버들과 보랏빛 맥문동 꽃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풀어놓는다.
 
옛 성주 선비들의 학문 수양의 장이었던 포천계곡 상류 만귀정에 배롱나무꽃이 피어 있다.
 
만귀정 아래 만귀폭포가 시원한 폭포수를 쏟아내고 있다. 주변에 만산일폭루란 작은 정자가 있다.
 
무흘구곡 제4곡인 선바위가 대가천 옆에 30m 높이로 우뚝 솟아 수려한 미관을 자랑하고 있다.




경북 성주는 그동안 참외의 명성을 빼면 알려진 게 별로 없는 지역이었다. 최근 사드(THAAD)가 주 관심사로 부상하면서 성주가 어디 있는지 처음 알았다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광자원과 문화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경남 합천에 속한 것으로 알려진 가야산의 성주 쪽 자락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그만인 계곡도 있다.

맥문동 꽃과 이끼로 그린 수채화, 성밖숲

성주읍 경산리 이천변에 이름도 예쁜 ‘성밖숲’이 있다. 글자 그대로 ‘성의 바깥에 있는 숲’이다. 성은 성주읍성을 가리킨다. 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의 공격을 받아 성문과 성곽을 잃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까지 거의 다 철거됐다. 돌을 쌓아 조성한 성은 사라졌지만 나무로 된 숲은 살아남았다.

숲은 오래된 왕버들로 유명하다. 1999년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57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수령 300∼500년짜리 왕버들은 세월만큼 둘레 6m, 키 20m에 이를 정도로 크다. 오랜 세월과 거친 풍파에 기력이 쇠한 듯 부목(버팀목)에 기대고 있지만 몸은 수없이 뒤틀려 물결무늬를 빚으며 장관을 이룬다.

숲은 당초 밤나무 숲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중엽 서문 밖 마을 소년들이 이유 없이 죽는 흉사가 이어졌다.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중간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말에 따라 밤나무 숲이 조성됐다. 지금 자라고 있는 왕버들은 임진왜란 뒤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냇가에서 신통치 않게 자라는 밤나무 대신 습한 곳에서 잘 자라는 왕버들을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즘 성밖숲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다. 이 숲은 8월에 진가를 드러낸다. 왕버들이 초록 이끼를 입으면서 비할 데 없는 시원한 그늘을 선물한다. 여기에 왕버들 아래로 보랏빛 융단이 깔린 듯 맥문동 꽃이 만개해 황홀한 풍경을 펼쳐놓고 있다.

성주군은 2011년 왕버들 주변에 맥문동을 심었다. 한약재로 쓰이는 맥문동은 라벤더와 꼭 닮은 보랏빛 꽃을 피우는 백합과 식물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자라는데, 이 부분을 캐서 약재로 사용한다. 봄에 채취해 여러 번 햇볕에 말린 다음 수염뿌리를 제거하고 다시 건조한다. ‘본초강목’이라는 본초의서에는 ‘이 풀의 뿌리가 보리와 비슷하며 수염이 있고, 그 잎사귀는 부추와 비슷하며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일러 맥문동(麥門冬)이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숲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메고 있다. 왕버들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지만 이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오래된 왕버들과 집단으로 피어 있는 예쁜 보라색 꽃은 조화로운 한폭의 수채화를 펼쳐놓고 있다.

숲은 넓고 쾌적하다. 아름드리 왕버들 군락 사이 산책로는 여유롭다. 혼자 사색하며 조용히 걷거나 벤치에 앉아 쉬노라면 온몸이 초록 물감에 젖는 것 같다. 한여름 더위는 얼씬도 못한다.

더위 씻어주는 수려한 포천계곡·무흘구곡

성주에서 물놀이 피서지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포천계곡이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 계곡 물이 마치 광목천과 같아 포천(布川)이라고 한다. 또 계곡의 반석에 심청색 무늬가 있어 마치 베를 널어놓은 것처럼 보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가야산 자락 8㎞에 이르는 계곡으로 암반 위로 흐르는 맑은 물과 수목이 절경을 이룬다. 빠르게 흐르는 상류 물길은 하류로 올수록 느려지며 굽이마다 아름다운 경치를 풀어놓는다. 그중 뛰어난 경치 9곳을 포천구곡이라고 한다.

포천계곡은 웅장하고 힘찬 가야산과 맑은 물 덕분에 옛 성주 선비들이 심신과 학문을 닦는 장으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선생이 만년을 보낸 만귀정이 상류에 있다. 정자 이름에 ‘늦은 나이에 돌아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만귀정은 돌로 약 1m 높이로 쌓은 축대 위에 올라서 있다. 전면이 4칸이며, 측면 또한 칸살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4칸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로 앞뒤가 터져 있으며 양 옆으로 방이 있고 방 앞에는 툇마루가 큰 마루와 연결돼 있다. 만귀정과 평삼문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이자형(二字形)으로 놓여 있다. 평삼문 입구에는 응와의 학문 진흥에 대한 의지를 담은 철제로 된 흥학창선비(興學倡善碑)가 세워져 있다.

주변에는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란 작은 정자도 있다. 아름드리 굵기의 전나무, 오래된 벚나무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규모는 작지만 세찬 기운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시원함을 내준다.

포천계곡 인근에는 무흘구곡이 있다. 수륜면 신정리 양정마을 대가천 변에 있는 제1곡 봉비암(鳳飛巖)은 회연서원(檜淵書院)을 품고 있다. 성주가 낳은 뛰어난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외증조 한훤당의 도학을 전수한 한강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아우르는 새로운 학풍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고 예학에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이다.

입구인 견도루(見道樓) 주변에는 배롱나무(백일홍)가 붉은 꽃을 맘껏 뽐내고 있다. 강당에 있는 숙종 임금 친필, 제자 미수 허목의 전서체와 해서체가 눈길을 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대가천의 경치는 더욱 기이한 자태를 뽐낸다. 금수면 무학리의 ‘배바위(3곡)’는 산줄기와 뚝 떨어져 굽이치는 냇가에 20m가량 솟아 있다. 옛날 대가천을 오르내리던 배들을 매는 정박지 노릇을 하기에 충분했다. 배바위에서 2㎞쯤 위쪽에 자리한 ‘선바위(4곡)’는 하천 바닥에까지 굳건히 내려선 밑동 위에 다섯 층으로 뾰족하게 쌓여 있다. 키가 배바위보다 10m 이상 큰 데다 몸매가 늘씬하고 미관도 더 수려해 일대 산수의 중심임을 선포하는 듯하다.

■ 여행메모
어린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참외생태학습원’ 꼭 들러봐야

수도권에서 자가용으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성주나들목에서 빠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성주읍내 방향으로 2.5㎞ 정도 달리면 성밖숲이 나온다. 3시간 남짓 소요된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다면 왜관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국도 33호선을 타고 10분만 더 가면 된다. 포천계곡은 성주읍에서 고령 쪽으로 10여 분 차를 몰고 가다 가천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신계리 방향으로 진입하면 만나게 된다.

성주참외에 대한 궁금증은 참외생태학습원(054-933-0375)에서 해결할 수 있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꼭 들를 필요가 있다. 여름철엔 성주호 안에 있는 수상레저테마파크 아라월드(054-933-0014)에서 다양한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월항면 대산리 성산 이씨 집성촌인 한개마을에는 전통한옥들 사이로 자연석에 황토를 발라 쌓아올린 토석담(사진)이 유려한 곡선을 이루고, 월항면 인촌리 태봉은 문종을 제외한 수양대군(세조) 등 세종대왕의 18왕자와 원손인 단종의 태가 안장된 곳이다. 성산동에는 성산가야의 지배층 무덤 129기가 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성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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