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서


 
1979년 YH무역 여성 노조원 187명이 신민당사에 진입해서 폐업반대 농성을 벌인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자전적 서사이지만 당대 불붙기 시작한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가공하여 에피소드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 제공
 
인분을 뒤집어쓴 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 회사와 야합한 남성노동자들이 인분을 투척했다. 필자 제공
 
위쪽 사진은 80년대 가리봉동 벌집촌 여공의 방(서울역사박물관 재현). ‘외딴방’의 ‘나’가 일했던 구로공단은 한때 수출총액의 10%가 넘는 제품을 생산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산업단지였다(아래쪽). 필자 제공
 
신경숙


1990년대는 단절과 이행의 시기였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대량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개인의 욕망은 의무와 억압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났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고 그에 따라 집단적 이념 및 혁명의 기대에 대한 회의와 환멸이 뒤를 이었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금욕에서 쾌락으로, 엄숙함에서 가벼움으로의 이행이 90년대의 분위기를 특징지었다. 90년대 문화 환경의 저변에는 ‘80년대적인 것’을 청산하고 그와 단절하려는 의식이 뚜렷하게 흐르고 있었다. 90년대 문학을 지배한 것도 마찬가지로 그 같은 단절의 욕망이다. 90년대 문학은 집단 역사 정치 이념 등으로 요약되는 80년대적인 가치와 결별하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그 대신 90년대 문학이 내세웠던 것은 개인 일상 내면 욕망 사소함 등의 가치다. 80년대 문학을 지탱했던 ‘큰 이야기’(거대 담론)는 소소한 ‘작은 이야기’로 대체됐다. 90년대 문학의 정체성은 그렇게 80년대적인 것을 억압하고 그로부터 단절하려는 의식을 통해 형성됐다. 그런 90년대 문학의 성격을 고스란히 압축해 보여준 것이 바로 신경숙의 문학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90년대 문학의 내향적 성격을 대표한다. 일상의 삶을 균열시키는 유무형의 사건이 빚어낸 미묘한 심리의 무늬를 직조하는 신경숙의 소설은 90년대 독자들에게 깊은 정서적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의 소설에서 외부 현실의 사건은 자아 내면에서 번져나가는 심리적 파문으로만 흔적을 남기고, 인물들은 깊숙이 가라앉은 삶의 상처를 골똘히 응시하고 어루만지면서 삶을 견딘다. 작가의 시선은 상처의 흔적이 새겨진 자아 내면의 굴곡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신경숙의 소설은 개인의 내면과 미세한 삶의 결에 대한 탐구로 관심을 옮겨간 90년대 소설의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로 받아들여졌다.

신경숙의 소설에는 그처럼 자아의 안쪽을 향한 시선과 함께 자아 바깥을 향한 또 하나의 시선이 공존한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 사라져가는 것,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신경숙은 자신의 글쓰기가 그 소외된 타자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려는 노력임을 줄곧 피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깥을 향한 시선이 다시 굴절되어 끊임없이 자아의 안쪽으로 되돌아왔던 것이 또한 신경숙 소설의 실상이다. 신경숙의 소설에서 타자는 대부분 ‘나’에게 남은 부재의 흔적이나 ‘나’의 분신의 형태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대표작인 ‘외딴방’(문학동네)의 글쓰기를 촉발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폐쇄된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글쓰기의 한계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실제로 작가 자신과 구별되지 않는 화자 ‘나’는 ‘외딴방’에서 소설이 “삶과 나란히 걸어갈 수 없다는 내 빠른 체념”과 그 “체념의 자리를 메워주던 장식과 연출과 과장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글쓰기를 반성한다. ‘외딴방’은 자기의 글쓰기가 직면한 그 한계를 글쓰기를 통해 반성하고 돌파하려는 과정 그 자체를 소설의 무대에 올려 연출하는 소설이다. ‘외딴방’에서 작가가 그려놓은 것은 지금껏 폐쇄적인 자아의 주변만을 맴돌았던 시선을 자기 바깥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타자의 생생한 삶에로 되돌려야 한다는 새로운 글쓰기의 다짐이다.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 기억이란 작가 자신이 구로공단의 여공으로 일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중심엔 희재 언니의 죽음이 있다. 잊고 싶은 그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겠다는 결심에 계기를 제공한 건 ‘나’가 여공시절 산업체학교의 동창인 하계숙에게 받는 전화다. 그녀는 말한다. “너는 우리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니.” 이를 계기로 결국 ‘나’는 외딴 방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억누르며, 스스로 억압한 그 시절의 기억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70년대 말 시골에서 상경해 산업체 특별학급을 다니며 구로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 기록이 그렇게 펼쳐진다.

‘외딴방’은 신경숙 특유의 내면 지향적인 서술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이르는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70년대 말 폭력적인 노조탄압의 상징인 YH사건과 동일방직사건, 80년대 초의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삼청교육대 등 한국현대사의 주요 국면들도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럼으로써 ‘외딴방’은 “가까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증언록”이자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이라는 평가를 얻기에 이른다.

실제로 작가는 외딴 방 시절 겪었던 노동 현실과 삶의 비참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나’)는 말한다. “그 시절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써보기로 했다.” 이를 통해 외딴 방에서의 가난했던 시절과 희재 언니를 비롯한 산업체 특별학급의 친구들, 노동 현장의 얼굴들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작가가 통과해왔던 한 시대의 급박한 흐름과 노동 현장의 모습이 실감 나는 풍속화로 재생된다.

‘외딴방’의 중심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는 주관적 기억의 서술이지만, 그 과정에서 시종 유지되는 것은 되도록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려는 태도다. 그에 힘입어 자기 내면에 대한 천착은 과도한 주관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외딴방’의 고유한 문학적 성과를 만들어낸 것은 그처럼 과거의 현실을 생생하게 재생하려는 의지와 작가 특유의 내성적 경향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긴장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적어나가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한다.

…나는 도망친다. 도망치는 나를 내가 붙잡는다. 앉아봐. 더는 도망을 못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앉으라구.

책상 앞을 떠나지 말자……지금 떠나면 못 돌아온다.


‘나’가 서술하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은 현재 글을 쓰는 ‘나’의 의식을 끊임없이 간섭한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 작가(‘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글을 쓰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소설의 곳곳에서 이처럼 글쓰기의 힘겨움과 망설임을 노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한다는 의지가 소설을 머뭇머뭇 조금씩 앞으로 밀어간다. ‘나’는 털어놓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힘겨워하면서 소심하고 소박하지만 솔직하게 진술한다. ‘외딴방’이 주는 감동의 많은 부분은 그처럼 감추고 싶었던 과거 이력을 힘겨움을 무릅쓰고 어렵게 들추어내는 그 과정의 절실한 내면의 드라마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외딴방’이 거둔 성과의 핵심은 한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증언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자기성찰의 진정성에 있다. 과거의 기억과 글을 쓰는 현재를 오가며 교차시키는 ‘외딴방’의 독특한 형식을 통해 작가가 묻는 것은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외딴 방 시절의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스스로 억압한 그 시절의 기억을 사실대로 진술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힘겹게 되살리며 적어나가는 ‘나’를 통해 작가의 고투와 글쓰기의 과정을 그대로 노출한다. 과거의 상처를 불러와 그 진실과 대면하고 화해하는 글쓰기의 과정 자체가 가감 없이 재연(再演)된다. ‘나’는 깊이 묻어두었던 과거 여공시절 노동의 기억과 관계의 상처를 끄집어내고, 그 상처와의 힘겨운 화해를 시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글쓰기가 처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과거의 상처와 부채의식은 그렇게 현재로 불려온다. 그리고 그것은 폐쇄적 내면으로 향하는 글쓰기의 시선을 견제하며 긴장을 유지하게 해주는 글쓰기의 내적 동력으로 활성화된다.

희재 언니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처럼, 신경숙에게 타자는 상처다. 타자는 ‘나’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러니 ‘나’의 상처로부터 도망치는 한, 소외된 타자에게 온당한 목소리를 부여하길 기대할 순 없다. 그것은 결국 자기 상처와 어떤 식으로든 결부되어 있는 모든 타자의 존재를 글쓰기의 바깥에 소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외딴방’이 되살린 그 타자는 “이름도 없이 물질적인 풍요와는 아무 연관도 없이, 그러나 열 손가락을 움직여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한사코 도망치고 싶은 ‘나’의 상처의 근원이다. ‘외딴방’의 글쓰기는 자기의 아픈 상처와 결부된 잊혀진 그 타자의 존재를 결국 인정하고 그들에게 인간적 존엄을 부여하면서 그들을 “나의 내부의 한켠을 낳아”준 ‘나’의 일부로 끌어안는 감동적인 화해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이제부터는 어떤 얘기를 하든 그 얘기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향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힘겨운 고투, 그것이 ‘외딴방’의 글쓰기다.

‘외딴방’은 신경숙 문학의 정점이다. 이 소설에서 신경숙 소설에 고유한 자기 상처에 대한 민감함과 자기연민은 자기애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잊혀진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가치 부여로 확장된다.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의 고투가 이루어낸 90년대 문학의 빛나는 성과다. 이후 신경숙의 문학은 ‘외딴방’이 도달한 성취를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 신경숙은
치밀한 내면 서술… 엄마를 부탁해 등 히트작 쏟아내

신경숙(54·사진)은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겨울우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90년 단편소설집 ‘겨울우화’가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93년 발간된 단편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 다음해부터 연속으로 출간된 장편소설 ‘깊은 슬픔’(94)과 ‘외딴방’(95)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급부상한다.

치밀한 내면 서술을 통해 익숙한 상황을 새롭게 만들거나 과거와 현재를 교차 서술함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좀 더 풍성하게 함으로써 소위 ‘80년대적인 것’(집단적·거대담론적·역사적)이 억압해왔던 개인의 감정과 욕망(사적·미시적·심리적)을 섬세하게 되살려냈다. 특히 ‘외딴방’은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연,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90년대 한국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에 집중함으로써 노동자의 일상과 내면을 섬세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기억이 어떻게 집단적인 기억과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외딴방’은 최근 미국에서 번역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후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99) ‘바이올렛’(2001) ‘리진’(2007) ‘엄마를 부탁해’(2008)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2010)와 단편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96) ‘딸기밭’(2000) ‘종소리’(2003) ‘모르는 여인들’(2011) 등을 발표했다. 이중 ‘엄마를 부탁해’는 최근 10년간 가장 많이 읽힌 한국소설로 집계될 정도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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