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나

소설 ‘종각’의 주인공 광주에게 종소리는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사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종각. 국민일보DB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안산공원에 세워진 소설가 만우 박영준 문학비와 만우정 정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로 20길 박영준의 고택.
 
박영준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 시간쯤 있어야 하는 새벽 네 시반. 최광주는 높다란 종각 꼭대기에 매달린 아름드리의 쇠종을 한 번 우러러 보고는 전선을 꼬아 만든 밧줄을 잡아당겼다. ‘땡그렁!’ 어두운 방에서 한 가치의 성냥불을 켜면 온 방 안이 빛으로 가득 차듯, 금속성의 종소리는 고요한 새벽 공기를 파헤치고 한 구석도 남김없이 번져 나간다.”(‘종각’ 중에서)

만우((晩牛) 박영준(1911∼1976)의 장편소설 ‘종각’의 첫 장면이다. ‘종각’은 죄의식을 통해 바라본 구원의 의미를 탐구한 대표적인 기독교 문학작품이다. 기독교적 인간성 회복이란 주제를 선명하게 다룬 ‘종각’은 기독교적 이해와 인식이 없다면 작품을 통속소설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종각은 기독교 사상의 본질인 ‘범죄→속죄(죄의식)→구원(용서)’의 구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타락한 윤리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용서와 구원의 선포

“광주는 언제나 종을 열다섯 번씩 친다. 자기가 젊었을 때 여자를 열다섯 명 범했다는 죄의식에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습관화되고 만 것이다.…종을 치면서 한 번 두 번 그 종소리를 세어갈 때 그의 가슴은 죄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었다.” (‘종각’ 중에서)

주인공 광주는 15명의 여자를 범했으며 또한 처제인 삼애마저 정욕의 화신으로 희생시킨 인물이다. 아내는 그 충격으로 첫딸 경선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광주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속죄하기 위해 교회 사찰을 담당하고 최소한의 살림을 위해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속죄의 삶을 살아간다. 광주는 삼애를 죽이려 마음먹었지만 집 앞에서 전도부인을 만나 계획이 무산된다. 경선을 미워했던 삼애는 깊이 뉘우치고 경선을 친딸로 받아들인다. 이에 광주는 고아원에서 경선을 데려오고 거지소년 명소를 입양한다. 그러나 동생 대주의 공금 횡령 사건으로 광주는 사찰직을 그만둔다. 목사의 누명을 벗겨주고 교회를 떠나기 전 광주는 교회의 종을 친다.

“‘뎅그렁 뎅그렁’ 종을 치면서 광주는 ‘너는 잘 참았다’ 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용서가 사랑보다도 더 힘든 일이니라’ 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광주는 생각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셨다.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뎅그렁 뎅그렁’ 광주는 종소리에 맞추어 ‘감사아 감사아’ 하며 감사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부풀어 자꾸만 종을 울리는 것이었다.”(‘종각’ 중에서)

‘종각’은 패륜적이고 비도덕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회복, 도덕성의 회복을 촉구한다. 또 인간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신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 묘사가 동일하게 주인공이 종을 치는 모습이다. 종소리는 작품 속에서 죄인에게 속죄를 자각하게 하고,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상징한다.

북아현동 작가의 한옥

그가 20여년 거주하며 작품을 집필한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아담한 한옥을 최근 찾았다. 이 주택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세운 인우학사 앞에 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들어선 동네에 유일하게 남은 한옥이다. 집에서 박영준은 수많은 장편과 단편들을 썼다. 대문 앞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언어 예술의 진경을 보이면서 삶의 윤리의 일관성을 추구한 선생이 1953년부터 1976년 타계할 때까지 기거하던 유서 깊은 문학 산실’이라고 쓰여 있다.

제자들에게 ‘영혼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는 오랜 지병인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연세대 문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정년을 며칠 앞둔 1976년 7월 14일 별세했다. 서대문구 안산공원엔 제자들이 그를 기념해 세운 ‘만우 박영준 문학비’가 있다.

박영준은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석훈은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일경에 끌려가 평양형무소에 수감됐고 이듬해 고문에서 얻은 병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 작가는 독실한 신앙가정에서 성장했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 미션스쿨을 다녔다. 그의 작품엔 기독교적 사상이 많이 침윤됐다.

박영준은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모범경작생’, 신동아에 장편 ‘일년’과 꽁트 ‘새우젓’이 당선돼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일제의 수탈로 인한 농민의 몰락 과정을 그린 장편 ‘일년’은 농민의 삶을 정치나 사회운동의 프레임이 아닌 농민 시선에서 묘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모범경작생’은 일제의 허구적인 농촌진흥 정책을 비판하고,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분노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목화씨 뿌릴 때’는 농촌 마을의 계층의식에 대한 비판을 그리고 있다.

그는 고독과 윤리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구한 치열한 작가정신의 소유자였다. 193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에 임용되면서 많은 문인을 길러냈고 장편 20편, 중편 11편, 단편 230편을 우리 문학사에 남겼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공간을 거쳐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의 작품 속 농민들은 압제와 수탈 속에서도 삶에 대한 적극성과 진취성을 잃지 않았고 전쟁의 참화 한가운데 던져진 인간의 삶도 넉넉한 감동의 소재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도시 소시민의 생활과 감성의 밀도 높은 정황 묘사로 가난과 고통을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담았다.

북아현동 고택에서 아랫골목으로 내려가면 그의 호를 따서 만든 ‘만우 소공원’이 나온다.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와 주민들을 위한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작가는 이 골목길을 걸으며 회개를 자각하게 하는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를 상상했을 것이고, 공원을 산책하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을 듯했다.

◆ 박영준처럼 생각하기

“죄인이기에 십자가 벗고 살 수 없다”


“증오는 애정과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나의 경우를 두고 말한 것 같다. 나의 낭만과 나의 향수는 역시 농촌에 있는 듯했고 그 농촌을 미워하고 또 아끼는 이중적인 심경도 결국은 향수로 뻗치는 하나의 공통된 길인 듯했다.” (‘나의 문학생활 자서(自敍)’중에서)

박영준은 등단 초기 ‘농촌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일년’ ‘모범경작생’ ‘아버지의 꿈’ ‘목화씨 뿌릴 때’ 등의 초기 작품들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들은 계몽성이나 사회주의의 목적성을 표방하지 않고 농민의 실상이나 집념을 다뤘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가진다.

작가는 흥미중심이나 탈윤리적 감각문학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인간적인 성실성과 정직을 통한 ‘선량한 인간상’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이는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엔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인류애가 충만하다. 작가는 소설 ‘종각’에서 목사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다. “마음의 십자가를 벗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백성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최소한도 자기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벗고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는 죄의식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의 은총을 얻고자 했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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