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대학이 학생 망치고 있다”… 美 ‘스타트업 대학’ 미네르바 스쿨의 실험

미네르바 스쿨 창립멤버인 켄 로스 아시아총괄 이사장이 13일 서울 성수동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에서 인터뷰하며 이 대학의 독특한 교육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는 변했는데 대학 교육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영희 기자
 
최대 18명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화상수업 화면. 미네르바 스쿨 제공
 
로스 이사장이 13일 루트임팩트 주최 콘퍼런스에서 강연하고 있다. 서영희 기자


“대학이 학생을 망치고 있다.”

많은 한국 학생이 유학하는 미국에서 2014년 이런 주장과 함께 새로운 대학이 문을 열었다. 인터넷기업 스냅피시를 운영하던 벤 넬슨(42)이 제안하고, 하버드대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낸 스티븐 코슬린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과학정책자문위원 비키 챈들러가 참여했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업체 벤치마크까지 2500만 달러(약 281억4000만원)를 투입해 4년제 학·석사 학위과정의 ‘미네르바 스쿨’이 탄생했다. 벤치마크는 이베이와 트위터에 투자했던 회사다. 미국 언론은 이 학교를 ‘스타트업 대학’이라 불렀다.

올봄 신입생 210명을 뽑았는데, 2만427명이 응시했다. 경쟁률 97대 1. 학생 모집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하버드대보다 들어가기 힘든 대학이 됐다. 캠퍼스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지만 학생들은 1학년만 여기서 보낸다. 나머지 3년은 학기마다 세계 6개 도시를 옮겨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 런던(영국) 베를린(독일)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하이데라바드(인도) 타이베이(대만) 그리고 서울.

미네르바 스쿨은 9월 서울에 기숙사와 수업시설을 마련해 2·3학년 학생 250명을 보낼 예정이다. 그 준비를 위해 켄 로스 아시아총괄 이사장과 몇몇 학생이 한국에 왔다. 서울 성수동 ‘소셜밸리’에서 사단법인 루트임팩트 주최로 열린 혁신 콘퍼런스에도 참가했다. 지난 13일 성수동에서 이들을 만나 물었다. 대학이 어떻게 학생을 망치고 있는지.

“대학은 재력을 보고 학생 뽑아왔다”

로스 이사장과 함께 온 최다나(21)씨는 지난해 9월 미네르바 스쿨에 입학했다. 당시 150명 입학생 중 그를 비롯해 5명이 한국 학생이었다. 중·고교를 미국서 다니고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던 최씨는 미네르바 스쿨을 택했다. 이 학교는 자체 입학시험을 치른다. 최씨에게 주어진 문제는 “만약 인간의 기대수명이 30세라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였다. 그는 “짧은 시간을 주고 서술하라 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솔직하게 썼더니 합격했다”고 말했다.

미네르바 스쿨의 입학전형은 독특하다. 원서에 중·고교 성적증명서 외에는 어떤 시험 점수도 기재하거나 첨부할 수 없다. SAT(수학능력시험) 성적도, 자기소개서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체 입학시험은 언제나 정답이 없다. 자기 생각을 글로 쓰게 하거나, 말로 풀어내는 걸 카메라로 녹화해 평가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냥 그렇게 살도록 놔두라’는 일본 속담을 제시한 뒤 3분 동안 생각을 말해보라는 문제도 있었다.

부모의 직업이나 집안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항목은 입학원서 어디에도 없다. 국내 로스쿨에서 문제가 됐던 ‘○○○의 아들’이란 식의 정보는 철저히 차단된다. 설립자 넬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SAT 점수는 그 학생 집안의 재력과 직결돼 있다. 부유한 학생일수록 점수가 높을 수밖에 없고, 값비싼 과외활동 경력으로 가산점을 받는다. 대학은 사실상 재력을 보고 학생을 뽑아 왔다. 우린 그런 정보를 원치 않는다.”

‘블라인드’ 전형을 완벽하게 구축한 미네르바 스쿨은 중·고교 성적증명서로 학생의 성실성을 평가하고, ‘엉뚱한’ 시험을 통해 잠재력을 판단한다. 로스 이사장은 “이런 방법으로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을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 거기에 겸손함을 갖춘 학생이 우리가 찾는 인재”라고 말했다. 그래야 사회라는 현실세계에서 신뢰를 얻고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뽑았더니 4년간 입학한 학생의 75%가 미국인이 아니었다. 유럽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큰 편차 없이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학생이 모여들었다.

7개 도시 ‘캠퍼스’…개념을 바꾸다

최씨는 9월 시작되는 2학년 과정을 서울과 하이데라바드에서 각각 4개월씩 이수한다. 서울에선 강남구에 마련되는 레지던스형 기숙사에서 지낼 예정이다. 3학년이 되면 베를린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부하고, 4학년 때는 런던과 타이베이로 가게 돼 있다. 이렇게 졸업까지 7개 도시에서 월∼목요일은 수업과 과제, 금요일과 주말은 ‘경험적 학습’을 한다.

로스 이사장은 “모든 학생은 각 도시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수업은 대부분 화상강의로 진행된다. 학생과 교수가 다른 도시에 있어도 얼굴을 마주보며 10여명 단위의 세미나 수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험적 학습은 그 도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말한다. 학생들은 현지 시민단체나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활동하며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를 수업시간에 접한 개념을 응용해 풀어가는 방식이다. 미네르바 스쿨은 그런 응용력과 융합적 사고를 학생 평가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고 있다.

북미 남미 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 등 대륙을 넘나들며 공부하는 학비는 1년에 2만9000달러(약 3250만원). 미국의 웬만한 사립대와 비교하면 3분의 2 정도로 저렴하다. 다른 대학처럼 넓은 캠퍼스를 갖추느라 부동산을 매입해 건물을 짓지 않기에 이렇게 할 수 있었다. 각 도시의 기숙사 등은 모두 임대해 마련하고 있다. 경제적 문제는 이런 교육을 받는 데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상당히 촘촘하게 장학금 제도를 갖춰 놓았다.

‘아직 존재 않는 직업’에 어울릴 인재

로스 이사장은 “세계가 빠르게 변화할 동안 대학교육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초·중·고교는 다양한 교육방식을 실험하고 시도해 왔지만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그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미네르바 스쿨이 꼽는 기존 대학의 두 번째 문제는 ‘수동적인 학생, 수동적인 학습’이다. 로스 이사장의 설명은 미국 대학도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의 문제점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주로 교수가 얘기하면 학생들이 받아 적거나 교재를 외워 시험을 본다. 뉴욕타임스도 미국 대학 강의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분석하며 능동적 학습을 강조했다. 아이비리그 대학이 많은 학생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정작 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만족도는 높지 않다. 그런 조사 결과는 부지기수다. 대학이 제 기능에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럼 미네르바 스쿨은 학생을 어떻게 가르치려는 걸까.

“학교 공부는 연습 과정이다. 학생들이 졸업 후 세상에 적응하려면 대학교육 역시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어선 안 된다. 학생들이 다양한 나라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졸업 후에도 각기 다른 상황에 쉽게 적응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지식보다 지혜를 주는 게 목표라고 했다. 왜 ‘지혜로운 노인(wise old men)’만 있는가, 젊은이는 지혜로울 수 없는가, 이런 물음을 토대로 학교 이름 ‘미네르바’도 그리스 신화 속 ‘지혜의 여신’에서 따왔다.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이유도 같다. 수업을 통해 익힌 것을 낯선 나라 낯선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 어떤 사람과도 함께 일하고 호흡할 수 있는 지혜를 위해 이들은 여행하듯 공부를 한다.

로스 이사장은 “학생들이 졸업 후에 빛나도록 그림자 역할을 하고 싶다”며 “우리 목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직업’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인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박세원 기자 sewonpark@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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