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외할아버지의 마당예술



비가 내리면 세상의 온갖 냄새들이 한꺼번에 올라온다. 비 오기 전 그 냄새들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다. 비 오는 날 도시에서는 하수구 냄새라든가,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옷에서 나는 땀 냄새가 MP3 볼륨을 키운 듯 커진다. 시골에서는 썩어 가는 두엄 냄새, 풀 냄새, 나무 냄새가 진해진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존재했던 각종 미생물이 ‘나 여기 살아 있소’라고, 비가 올 때야 비로소 냄새로 외치는 것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공원 바로 옆이었는데 장마가 지기 전에 도시공원의 관리과에서는 자주 풀을 베었다. 비 오는 날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그럴 때는 진한 풀 비린내가 풍긴다. 풀의 수액에서 나는, 말하자면 식물의 피 냄새일 텐데. 동물의 피 냄새 못지않게 비릿하다. 자라고 뻗어 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베어버리면 저런 생생한 냄새가 나는구나 알았다. 하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후 들판에서 나는 마른풀 냄새가 나는 더 좋다. 이제는 느껴 볼 수 없는 초가집 처마지붕 아래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것들도.

어렸을 때 우리 외갓집은 초가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붕 교체를 했다. 아마도 ‘새마을 운동’ 때 그리된 것 같다. 초가지붕은 몇 년에 한 번씩 짚이 삭아 썩은 지붕을 내려 태우고 새 짚으로 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는데, 농사에는 크게 소질이 없으셨지만(그래서 할머니가 힘드셨다고) 초가 이엉 얹는 일은 기가 막히게 잘하셨다고 한다. 풍성하게 새 이엉을 지붕에 얹고 단발머리 소녀의 앞머리처럼 단정하게 처마 끝을 맞추어 자르셨다고. 그래서 그 동네에서도 우리 외갓집은 가장 예쁜 집이었다. 비가 오는 날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드시며 예쁜 초가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쳐다보셨을 우리 할아버지. 가뭄이 오래되면 아침 일찍 마당에 곱게 물고기 비늘처럼 싸리 빗자국을 남기고.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그 위에 뿌리던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마당 예술’은 어린 나에겐 지금의 잭슨 폴록 그림보다 훌륭했다.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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