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비 오는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빗소리를 들으며 깼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헷갈릴 땐, 자기 전에 생각하던 사람을 잠이 깼는데도 계속 생각나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빗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설레다니. 나는 비를 무척 그리워했구나.

얼마 전 미국 미네소타에 사는 친구가 SNS에 막내가 처음으로 혼자 우산을 쓰고 신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주었다. 친구의 꽃무늬 우산. 망가지지도 않아 오래 갖고 있던 우산이라는데. 해맑은 아이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가 가지고 있던 꽃무늬 우산을 흔들며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저 밑바닥에서 뭔가가 뭉클 쏟아졌다. 내가 그 아이 만했을 때, 비가 오면 내 손으로 직접 우산을 받치고 새 장화를 쓰고 비 오는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내 키가 일 미터밖에 안 되는 시절엔 하루가 한 달 같은 법. 게다가 기다리는 것은 더 오지 않는다. 엄마가 장날 사다주신 고무장화가 너무 신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가뭄에 사다주신 것이다. 동생 장화는 노란색이었고 내 것은 빨간색이었다. 가뭄은 길었고, 장마는 길지 않았다. 흐리기만 하고 비가 오지 않는 저녁에 마루에 앉아 있으면 개구리들이 심하게 울었다. “엄마, 저렇게 개구리들이 많이 울면 내일은 비가 오겠지요?” 반찬은 물에 만 오이지였고, 나는 밥 속에 든 완두콩을 상 바닥에 골라내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혼나지는 않았다. 골라낸 완두콩을 밥을 다 먹은 후 한꺼번에 숟가락에 담아 한 알도 안 버리고 모두 먹었으니까.

나는 혼자 힘으로 우산을 받치고 빗속을 아무렇지 않게 걷는 사람이 된 지 오래되었고, 가뭄이 길어져 우산 받칠 일이 없는 여름은 모두에게 괴로움이라는 것도 알게 된 지 오래다. 비를 사랑한다는 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비 피해 소식이 들릴까봐서다. 미세먼지도 쓸어내려주고, 갈증 난 모든 것을 충분히 적실 만큼 와주고,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에 궁전 같은 흰 구름을 보고 싶다.

글=유형진(시인),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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