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비화] ‘한국판 쉰들러’ 알리지 않고… 노동·기도하며 수도자의 삶

미국 뉴저지주 뉴턴 수도원에 세워진 레너드 라루 선장의 묘비. 오른쪽은 말년의 라루 선장 모습. 전석운 특파원, 바다의 사도 제공


‘흥남철수’의 영웅이자 ‘한국판 쉰들러리스트’의 주인공 레오나드 라루 선장은 미국 뉴저지주 뉴턴의 한 수도원에 묻혀 있었다. 뉴욕에서 서쪽으로 1시간15분가량 달리면 나타나는 뉴턴 수도원은 라루 선장이 이름을 마리너스로 바꾸고 수도자로 변신한 뒤 남은 인생을 모두 보낸 곳이다.

26일(현지시간) 찾아간 뉴턴 수도원은 50만평 부지에 크리스마스트리용 나무가 빽빽이 심겨져 커다란 농원을 연상케 했다. 수도사들이 직접 심은 나무들이라고 했다. 라루 선장의 묘는 수도원의 식당 뒤쪽으로 300m쯤 돌아 들어가니 나타났다. 3m 높이의 예수상이 서 있는 조그만 언덕 아래에 있었다. 가로 20㎝, 세로 10㎝ 크기의 소박한 비석 앞에는 언제 누가 다녀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바짝 마른 꽃 한 송이가 꽃병에 꽂혀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수도자의 묘비 10여기가 나란히 있었다.

비석 외에는 라루 선장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기거하던 방은 방문객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바뀌었고, 굳게 잠긴 문서고에 들어 있다는 그의 유품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12명의 수도사들이 드넓은 농장에서 하루 종일 노동하느라 문서고를 정리할 여유가 없다고 했다. 마리너스가 가장 오랫동안 일하던 선물가게는 찾는 사람이 없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뉴턴 수도원장인 김 사무엘 신부는 “수도원 운영이 안정되는 대로 마리너스 수도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김 사무엘 신부는 “라루 선장이 구조한 사람 수만큼 1만4000그루의 나무를 기부하겠다는 제안도 받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하자는 제안도 있었다”며 “그러나 소박한 수도사의 삶을 살다 간 그분의 생에 맞춰 가급적 추모 사업 규모를 줄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뉴턴 수도원장을 지낸 조엘 마컬 신부는 “수도사 마리너스는 말수가 거의 없고 조용한 사람이었다”며 “동료 수도자들이 대부분 그가 한국인 1만4000명을 구한 선장 출신이라는 걸 몰랐다”고 말했다.

수도사 마리너스는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흥남철수 작전의 공로로 몇 차례 훈장 등을 받았지만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은 2000년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작가 빌 길버트가 라루 선장의 흥남철수 작전을 조명한 책 ‘기적의 배(Ship of Miracles)’가 출판된 뒤에야 주변에서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수도원 관계자는 “마리너스는 자신을 직접 알아보는 사람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한국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지만 매일 조용히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뉴턴 수도원은 수도자 지망자가 줄고 재정 위기에 몰리면서 2000년 문을 닫을 위기에 몰렸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수도원이 “라루 선장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뉴턴 수도원을 인수하고 한국인 신부 2명을 포함한 8명을 파견했다. 마리너스 수도사는 한국에서 뉴턴 수도원을 운영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이듬해 편안히 눈을 감았다.

뉴턴(뉴저지)=전석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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