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비화] “라루 선장, 망설임 없이 피난민 모두 태우라 명령”

1950년 12월 22일 한국전쟁 당시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만4000여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갑판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다. 빅토리호 선원 로버트 러니씨는 “레너드 라루 선장이 피난민을 모두 태우라고 명령했다”고 회고했다. 로버트 러니씨 제공




“레너드 라루 선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흥남부두의 피난민들을 모두 태우라고 명령했어요.”

흥남철수에 참여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당시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90)는 지금도 당시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설명에 거침이 없었다. 26일(현지시간) 뉴욕 자택에서 만난 러니는 피난민들의 구조 상황을 설명하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눈물을 쏟기도 했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22일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이미 유엔군은 모두 철수한 뒤였다. 부둣가에는 여전히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 1만4000명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흥남시내는 중공군의 포격으로 불길이 치솟았고, 바다에는 기뢰가 가득했다. 빅토리호에는 항공유 300t이 실려 있었다. 부산에서 하역하던 중 급히 흥남 지역으로 되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서둘러 출항하느라 아직도 기름이 남아 있었다. 기뢰에 부딪치면 배가 폭발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상황이었다. 미 해군 장교는 라루 선장에게 다가와 “피난민들을 태울 수 있겠느냐”며 “선원들과 상의해 알려 달라”고 말했다. 피난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배는 빅토리호가 유일했다. 라루 선장은 “얼마나 태워야 하느냐”고 물었다. 장교는 “할 수 있는 한”이라고 답했다. 화물선인 빅토리호에는 선장을 포함해 모두 47명이 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는 추가로 12명을 더 태울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라루 선장은 곧바로 “부두에 있는 사람을 모두 태우라”고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에 화물칸을 열고 1만4000명을 차례로 승선시켰다. 화물칸이 가득해지자 갑판에도 수천명을 태웠다.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러니는 “배에서 선장의 명령과 권위는 절대적”이라며 “라루 선장이 선원들 중 누구와도 피난민을 태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을 내렸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선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며 “라루 선장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자 성인(聖人)의 자격을 갖췄다”고 강조했다.

러니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한국인 피난민들은 상당히 질서정연하게 배에 올랐다”며 “영화 ‘국제시장’처럼 그물에 매달리거나 배를 향해 헤엄치는 혼란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증거로 당시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을 제시했다. 사진 속에는 머리에 짐을 이고, 어깨에 봇짐을 멘 피난민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널빤지를 밟으며 배에 오르는 순간들이 잡혀 있었다.

당시 14살로 아버지와 함께 빅토리호에 오른 원동혁(81·미국 오하이오 거주)씨도 러니의 설명에 동의했다. 원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영화가 극적인 재미를 위해 조금 과장됐다”며 “배에 오르다 물에 떨어져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1만4000명이 올라탄 배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은 상황이었다. 배에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화물칸은 낮에도 캄캄했다. 누울 공간이 없어 대부분 선 채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거제도로 가는 사흘을 버텼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생아 5명이 배에서 태어났다. 빅토리호에는 산부인과 의사도, 의료시설도 없었다. 그러나 주변 아주머니들은 스스럼없이 산모의 출산을 도왔다. 선원들이 할 수 있는 건 주전자에 끓인 물을 주는 것뿐이었다.

빅토리호 선원들은 신생아 5명을 ‘김치 1호’∼‘김치 5호’로 각각 명명했다. 러니는 나중에 김치 1호와 김치 5호를 만났다고 했다. 김치 1호는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으며, 김치 5호는 거제 장승포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이경필씨다.

러니는 라루 선장이 수도원으로 들어간 뒤에도 몇 차례 그를 만났다. 라루 선장이 소천한 뒤에도 6∼7차례 그가 묻힌 뉴턴 수도원을 찾아 추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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