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리


 
①6·25전쟁 때 피난민들의 모습. ‘관촌수필’ 속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초를 겪는다. ②1977년 무렵의 작가. ③90년대 초반 방영된 SBS 드라마 ‘관촌수필’의 한 장면. 원작자인 이문구가 직접 각색과 극본을 맡았다. ④‘관촌수필’ 3편 ‘행운유수’를 각색한 연극 ‘옹점이를 찾습니다’ 포스터. ①에피파니, ②③④필자 제공
 
이문구 작가


이문구는 유년시절 한국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은 작가다. 남로당 보령군당 총책으로 활동하던 부친은 6·25가 발발하자 곧바로 예비검속으로 사살됐고 위로 두 형도 함께 빨갱이로 몰려 각각 오랏줄에 엮여 살해되고, 산 채로 바다에 수장됐다. 그 충격으로 넋이 나간 조부 역시 곧 세상을 떠났다.

그후 이문구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실제 생명까지 위협받으며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고향을 떠나 떠돌던 어린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 것은 필화(筆禍) 사건에 휘말린 시조시인 이호우가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는 신문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고 그는 작가가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문학을 하기로 결심한다.

문학은 그에게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이때 이문구가 택한 것은 우익 문학인이었던 김동리의 그늘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동리는 그를 작가로 키워주었고 그가 1970년대 이후 진보적 문인의 길을 택한 뒤에도 그의 문학관에 일체 간섭하지 않으면서 정권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이문구는 그런 김동리를 평생 사부로 모시며 의리를 다했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야기한 온갖 풍파와 인간사의 곡절을 두루 통과해온 이런 이력을 새삼스레 들추는 건 그것이 그의 문학적 내면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몰락과 상실에 이어진 탈향과 간난신고의 심리적 파장, 그 이전의 충만했던 과거에 대한 통절한 상실감과 뼈저린 비애는 그의 문학세계를 심층에서 움직여가는 은밀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김동리의 소설 실기 수업에서의 유명한 일화 하나. 당시 서라벌예대 문창과 1학년이던 이문구의 습작소설을 놓고 토론하던 중 사건도 줄거리도 없는 이게 어찌 소설이냐, 소설의 기초도 안 됐다며 학생들의 성토가 쏟아졌다.(그 학생들 중에는 조세희, 한승원, 박상륭도 있었다.)

그러나 김동리의 강평은 의외였다. “나는 이 학생이 앞으로 우리 한국 문단에 아주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동리가 출제한 그해 기말고사 문제는 놀랍게도 이문구의 습작소설에 대해 논하라는 것이었다. 김동리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리고 이문구는 ‘사건도 줄거리도 없는’, 기본기가 덜 됐다고 비판받은 바로 그 특징을 그의 소설 고유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일관된 사건과 줄거리의 연속으로 구축되는 서구적 근대소설의 규범에 비춰보면 그것은 분명 결함이다. 그러나 이문구는 그런 서구적 소설의 관습과 규범을 훌쩍 일탈해 구어체적 사설(辭說)로 느슨한 구성을 얼기설기 엮어가는, 한국적 서사 전통에 뿌리박은 ‘다른 소설’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관촌수필’은 이렇게 형성된 이문구의 문학세계가 농익어 만개한 그의 대표작이다. 1972년 ‘일락서산’(日落西山)을 시작으로 ‘화무십일’(花無十日) ‘행운유수’(行雲流水) ‘녹수청산’(綠水靑山) ‘공산토월’(空山吐月) ‘관산추정’(關山芻丁) ‘여요주서’(與謠註序) ‘월곡후야’(月谷後夜) 등 차례로 발표된 8편의 단편이 한데 묶여 1977년 연작소설의 형태로 출간됐다.

이 연작은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고향인 관촌부락(지금의 충남 보령시 대관동)에서의 충만했던 유년의 시간과 그의 가족 및 고향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연작을 여는 단편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 ‘나’는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고향은 이제 ‘나’가 그리던 그 고향이 아니다. 완전히 “타락한 동네”로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저미는 비감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이 퇴색하고 구차스럽게 변해버렸다. ‘나’의 살과 뼈가 여문 동네였지만 옛 모습을 제대로 간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탄식한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墓)들밖에 남겨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뼈저린 비애와 상실감 속에서 ‘나’는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낸다. 특히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이자 위엄과 고고(孤高)의 상징이었던 할아버지의 존재는 ‘나’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조상의 얼”이자 고향의 이미지 그 자체다. ‘나’는 자기에게 지대한 정신적 영향을 끼친 조부의 풍모와 가르침을 회상하고, ‘나’를 키운 그 시절의 가족과 풍경들,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나’를 감쌌던 갖가지 냄새들을 사무친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나’가 떠올리는 고향은 근대 이전에 머물러 있지만 조화와 인정과 도리가 살아 있는, 그 자체로 충만한 이상적인 공간이다. 옛 고향은 이제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고향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현재로 불려와 사뭇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문구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인정과 의리가 사람살이의 기본이 되는 조화와 화해의 공동체다. 그것은 ‘나’를 키운 모든 것이다. 언제나 넉넉한 품으로 ‘나’를 조건 없이 받아주고 감쌌던 고향 사람들도 그렇다. ‘일락서산’에 이어지는 단편들은 그들의 인정미 넘치는 진면목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예컨대 일곱 살에 허드레 심부름꾼으로 들어와 함께 살며 집안일을 도맡았고 걱실걱실한 성격에 ‘나’를 살뜰히도 챙겼던 옹점이(‘행운유수’), 어린 ‘나’를 넉넉하게 받아주고 이웃의 궂은일에도 노고를 마다않던 속 깊고 듬직한 성격의 대복이와 신 석공(石工) 등. 그들은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생래적으로 삶의 지혜와 법도를 몸과 마음에 익힌 의리와 인정 넘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결곡한 심성은 전쟁의 회오리와 세상사의 신산고초도 비껴갈 만큼 한결같이 우뚝하다. 이문구가 기억 속에서 되살려낸 이 인물들의 면면은 근대의 계산적인 인심과 풍속에 밀려 사라져간 공동체적 인간 가치와 심성을 곡진하게 환기한다.

‘관촌수필’은 지금 없는 고향과 그곳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무친 기억의 헌사이며 그로써 그 모든 것들을 앗아간 한국적 근대의 마성(魔性)에 기억의 힘으로 저항하는 소설이다. 이문구는 과거의 고향을 그리움으로 기억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복고적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오히려 그의 소설은 인정과 의리가 충만했던 공동체적 사람살이의 가치를 망각하고 상실해버린 산업화시대의 소외와 타락의 현실에 대한 우회적이지만 강력한 비판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은 은연중 그렇게 현재를 겨냥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은 더 나아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상상을 불러온다. 거기엔 또한 자신을 키운 그 가치를 잊지 않고 기어이 제 몸으로 살아내겠다는 고집스런 다짐까지도 보이지 않게 얹혀 있다. 의고체 문장과 한데 엮인 생생한 충청도 방언과 토착적 입말의 사설이 유려하게 굽이치는 이문구 소설 고유의 문체는 그 다짐을 실천하는 문학적 형식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나는 여태껏 그 대복어메처럼 수다스럽고 간사스러우며, 걀근걀근 남 비위 잘 맞추고 아첨 잘하는 여자를 본 일이 별반 없는 줄로 안다. 그녀는 별쭝맞게도 눈치가 빨라 무슨 일에건 사내 볼 쥐어지르게 빤드름했고 귀뚜라미 알듯 잘도 씨월거리곤 했는데, 남 좋은 일에는 개미허리로 웃어주고, 이웃의 안된 일엔 눈물도 싸게 먼저 울어댔으며, 욕을 하려들면 안팎 동네 구정물은 혼자 다 마신 듯이 걸고 상스러웠다. 키도 나지리한 졸토뱅이로서, 입 싸고 발 재고 손 바르며, 남의 말 잘 엎지르고 자기 입으로 못 쓸어담던 만큼은, 내 앞엔 입때껏 다시 없을 만한 여자였던 것이다.

이런 식의 문장은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근대 표준어 문장의 어법을 의도적으로 멀리한다. 대신 구어의 맛을 살린 방만하고 질펀한 긴 호흡의 사설은 인물의 됨됨이를 생생하게 부각하면서 그와 결합된 토착적 정서 또한 더불어 되살려낸다. 대개가 그런 식이다. 능청능청 늘어지면서 느긋하게 는적거리는 이문구 소설 특유의 문체는 그 자체로 근대의 속도에 대한 저항의 문학적 형식이다. 그의 문장은 개발의 시간에 역행하는, 어쩌면 사라진 농촌 공동체에나 있음직한 느긋하고 유장한 시간을 창조해낸다. ‘관촌수필’에서 굽이치며 생동하는 한국어의 리듬과 말맛을 음미하며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느긋하고 충만한 시간 속에 침잠하는 자신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옛 고향이 그랬듯이, 이제는 그 작가 이문구마저 가고 없다. 이제 한국소설에서 그가 우리에게 선물했던 조화로운 마음의 풍경과 한국어의 생동하는 말맛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침 세상을 뜬 조부를 회고하는 ‘일락서산’은 상실의 비애가 짙게 저민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

이문구는 충청도 방언의 힘 보여준 농촌의 작가

이문구(1941∼2003)는 ‘관촌수필’의 배경이 된 충남 보령의 관촌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사대부가의 후예’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익혔지만 공산주의 활동에 연루됐던 아버지 때문에 결국 아버지를 비롯해서 두 형들,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거의 모든 가족의 죽음을 겪는다.

1961년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한 뒤 65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다갈라 불망비’를 김동리 추천으로 발표한다. 그는 주로 한국의 농촌과 농민의 노동과 일상을 다룬 소설들을 썼다. 특히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중심으로 과거의 농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근대화의 과정에서 소외당하고 훼손당한 농촌사회의 아픔을 다룬 ‘관촌수필’ ‘우리동네’ 연작을 발표하면서 작가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특히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충청도 방언은 단순히 문체에만 한정되지 않는, 작품 구성의 기본이자 주제이며 정서를 이루는 소설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김동리의 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문단 내 보수적인 인사들과 인연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실천문학 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진보 인사들과도 친숙했기 때문에 문단의 보수와 진보 성향을 아우르는 역할을 자처해왔다.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장한몽’, ‘매월당 김시습’과 단편소설집 ‘해벽’ ‘관촌수필’ ‘우리동네’ ‘유자소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이 있다. 위암으로 투병 중 2003년 별세했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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