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세대, 세상에 묻다] “‘취시오패스’된 것 같다”… 밀려드는 자괴감



“아시다시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실업이 40만명에 육박하는 이때,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없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2003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방송됐던 MBC 시트콤 ‘논스톱4’에 나오는 고시생 앤디의 대사다. 대사 속 숫자는 이후 40만명에서 50만명, 60만명으로 바뀌었다.

시청률 최고 19.8%를 찍었던 이 시트콤을 당시 수많은 중·고생이 보며 대학의 로망 뒤에 ‘경기침체’와 ‘청년실업’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이들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가 된 올해 상황은 어떨까.

25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만 15∼29세) 실업자는 41만9000명이다. 여기에 30∼39세 실업자(18만4000명)까지 더하면 넓은 의미의 청년실업자는 60만3000명에 달한다. 또한 지난해 말 취업준비생은 62만8000명이다. 실업자 통계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123만명의 젊은이가 직업을 구하지 못했거나 직업을 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트콤에 등장했던 대사는 이제 ‘자조(自嘲)’ 혹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신조어로 바뀌어 돌아왔다.

‘취준생’의 하루

지난 2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한 임모(27)씨는 취업준비생, 즉 ‘취준생’이다. 불안정한 아르바이트보다는 번듯한 직장을 구하고 싶다. 그는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스펙을 쌓는 기간을 가진다는 점에서 기존 구직자와 조금 다르다. 임씨는 친구나 친척을 만나 근황을 얘기할 때 “취준(취업준비) 중이에요”라고 말한다. 다들 알아듣는다.

임씨의 주요 일과는 스펙 쌓기다. 학점, 자격증, 어학능력, 봉사활동, 대외활동, 인턴 등 분야는 다양하다. ‘학교 간판’ 즉 학벌은 가장 중요한 스펙 중 하나다. 서울의 중위권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임씨는 “상위권 대학 졸업장을 욕심내기엔 너무 늦었다”면서 “더 좋은 대학을 나온 친구도 취업에 힘든 걸 보면 다른 스펙을 쌓는 게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는 영어 점수를 올리기 위해 ‘스터디’를 한다. 토익(TOEIC) 점수는 800점 턱걸이 수준이고, 스피킹 레벨도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 강남에서 학원 강의를 2개나 듣는다. 학원에서 지정한 사람과 스터디 모임을 꾸려 영어 단어 암기 시험을 보고 강의 숙제도 공유한다.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도 준비 중이다. 이미 컴퓨터를 능숙하게 쓰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생활스터디’를 하는 사람들과 중고책을 ‘공구’(공동구매)해 제본했다. 생활스터디는 아침에 도서관에 출석했는지, 공부시간을 지키는지 확인하는 모임이다.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사진을 아침에 ‘단톡방’(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올리지 못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이 생활스터디는 점심·저녁 식사 모두 함께 먹는 ‘밥터디’(밥 먹는 스터디)이기도 하다.

자소설과 열정페이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래도 ‘취준’을 잊으면 안 된다. ‘자소설’(자기소개서와 소설의 합성어) 소재를 찾아야 한다. 임씨는 취업준비를 시작한 첫해 서류전형에서 ‘광탈’(빛의 속도로 탈락) ‘전탈’(전부 탈락)했다. 그 뒤 ‘취뽀’(취업 뽀개기)에 성공한 친구의 자기소개서를 보고 나서 그가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자신의 것처럼 쓴 뒤 첫 서류합격을 맛봤다.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자소설 소재를 찾는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에게 ‘인생에서의 성취’나 ‘고난 극복 방법’을 묻는 기업을 이해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스터디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땐 구직 사이트를 뒤진다.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인턴 자리를 찾는 것이다. 인턴 경험은 이력서에 한 줄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소설의 좋은 소재다. 다만 ‘열정페이’(열정을 빌미로 한 저임금 노동)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임씨는 지난해 4∼7월 한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했다. 1주일에 두세 번 야근을 했지만 매월 4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 한 번은 금요일 오후 5시30분에 야근을 지시받기도 했다. 임씨는 그 순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취준생을 힘들게 하는 것들

요즘 임씨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주변 사람이다. 먼저 취업에 성공한 친구를 보면 부러움과 질투가 교차한다. 고교 동창의 취업 소식에 “나보다 공부를 못했었는데 대학에서 ‘취업깡패’인 ‘전화기’(전자공학·화학공학·기계공학)를 전공으로 선택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취업한 친구가 SNS에 사원증이나 명함을 자랑스럽게 올릴 때마다 자괴감을 느낀다. 임씨는 “이런 나 자신을 보면 ‘취시오패스’(‘취준생’과 ‘소시오패스’의 합성어)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기성세대와의 ‘골짜기’도 문제다. 직장에 대한 생각 차이가 너무 커서 각자 절벽의 양쪽 끝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졸업한 학과 교수 주도로 열린 학교 선배와의 멘토링 모임에서 만난 대기업에 다니는 선배는 ‘노오력’을 강조했다. 그 선배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워라밸’(워크·work, 라이프·life, 밸런스·balance의 준말)만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멘토링 모임이 끝난 뒤 “우리 때는 대기업도 골라서 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에 취직했다. 임씨는 “회식에서 어떻게 분위기를 띄웠고, 다음날 어떻게 출근했는지 늘어놓는 선배에게 우리의 ‘노오력’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고 푸념했다.

부모 지인의 추천으로 대기업 인턴을 시작했다는 대학 후배,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겠다는 고교 동창을 볼 때면 상대적 박탈감이 밀려온다. 임씨는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취직조차 힘든 나에 비하면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수저 계급론’이 실제로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홍석호 조효석 안규영 기자 wi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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