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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레이디 고디바

존 콜리에의 ‘레이디 고디바’


“아이 열심히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잘해서 성공했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지 모르겠어요.” 내가 상담했던 여성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차라리 “무슨 무슨 이유 때문에 우울한 거예요”라고 털어놓을 수 있으면 덜 괴로울 텐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마음의 병은 깊어졌다. 도저히 혼자 참을 수가 없어서 “여보, 나 지금 너무 우울해요”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남편이 한마디 한다. “당신이 배가 불러서 그런 거야!”

40대 후반부터 여성 우울증은 급격히 늘어난다. 폐경이라는 생리적 변화보다 중년이 겪는 심리적 변화가 더 중요한 원인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는데, 지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젊음은 날아가 버렸고 어느새 나는 세상 끝으로 밀려난 것 같다고 느낀다. 점점 늙어갈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낼 자신이 없다. 남편이라도 응원해 주면 좋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족이나 챙겨”라고 어깃장을 놓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존 콜리에의 미술 작품 ‘레이디 고디바(Lady Godiva)’를 보자. 아름다운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 등에 앉아 있다. 그림 속 여자는 11세기 잉글랜드 중부 코벤트리의 영주 레오프릭 백작의 부인, 고디바.

그녀의 남편은 농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려 고통에 빠뜨렸다. 고디바는 남편에게 “세금을 낮춰서 사람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청을 들은 백작은 “당신이 발가벗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낮춰 주겠소”라고 했다. 백작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어’라며 아내의 진심을 얕잡아봤다. 하지만 고디바는 그렇게 했다. 백작은 세금을 줄여야만 했고, 사람들은 고디바를 칭송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도 우울증은 생긴다. 겉으론 편해 보여도 남모를 스트레스 한두 개쯤 누구나 갖고 있게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우울증을 통틀어 단 하나의 원인을 꼽으라면 ‘의미 상실’이라 할 수 있다. 꿈은 청년만 품는 게 아니다. 끝까지 버텨내야 하는 중년에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는 더 중요하다. 나를 넘어 삶의 의미를 향해 몸을 던질 때 우울증은 사라진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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