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룰렛의 결과물




타국의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내의 선물을 사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들을 보게 된다. 주로 탑승구 앞 작은 면세구역에서. 나도 화장품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어떤 분의 선택에 동원된 적이 있다. 그 남자는 아내 선물용으로 뭐가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자신보다는 더 나을 거로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겠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결정 장애를 겪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에센스와 크림 세트를 권했는데 그분은 눈치챘을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이거 좋아요” 했던 건 결국 룰렛의 결과물 같은 거였음을. 곧 그 일행이 다가와 모두 같은 걸 사갔다. 그걸 보고 있으니 예전에 우리 아빠가 사왔던 선물들도 이런 과정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출장길에 사온 선물들은 어린 나이에도 좀 ‘난감했던’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그 선택에 무책임한 행인이 개입되었던 건 아닌지, 좀 늦은 의심을 해본다.

난감했던 선물 중 하나는 크리스천 디올의 립스틱이었는데, 아주 진한 보라색 립스틱이 세 개나 한 상자에 들어 있었다. 혹시나 피부에 닿으면 색깔이 다르게 나는 건가 싶어서 입술에 발라봤는데, ‘쌩, 보, 라, 색’이었다. 지금이라면 다른 색과 ‘믹스’한다든지 ‘그러데이션’을 시도해 봤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열여섯 살에게 보라색 립스틱은 무용지물이었다. 그 시대엔 확실히 그랬다.

그 보라색 립스틱은 유효기간과 관계없이 내 서랍 속에서 건재했다. 그러다가 5년 후,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빛을 발했다. 연극 공연의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귀신을 분장하는 용도로 썼다. 세 개 세트 중에 두 통을 그 공연에 쏟아부은 것이다. 공연에는 졸업한 선배들도 왔는데, 그들은 연극이 끝난 다음에 “분장이 왜 그런 거야”라고 했다. 난 그때 분장은커녕 화장도 할 줄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단지 룰렛의 결과물처럼 배정받은 역할이 분장이었을 뿐. 풀죽은 나를, 귀신 역할의 배우가 이렇게 위로했다. “괜찮아, 이거 다 디올이잖아. 그치?”

윤고은(소설가),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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