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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노트] 요리하는 남자

앤드루 콜리의 ‘요리하는 노인’


‘저녁 식사로 뭘 해 먹을까’ 고민하며 요리책을 뒤적였다. 일본식 된장 돼지고기볶음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냉장고에 돼지고기는 없었고, 불고기 만들 때 남겨뒀던 소고기가 있었다. ‘그래 이걸로 대신 하자.’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익히는 정도가 달라야 하니 조리 순서만 바꾸면 될 것 같았다. 야채 칸에는 송이버섯 네 개, 가지 하나, 파란 고추 몇 개와 노란 피망 반 토막이 있었다. ‘사둔 지 오래돼 그대로 놔두면 신선도가 떨어질 테니 이번 요리에 쓰자.’ 먼저 미소 된장과 미림을 섞고 간장과 설탕으로 간을 맞춰 양념을 만든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야채를 볶다가 숨이 살짝 죽었을 때 만들어 둔 양념을 넣는다. 그리고 소고기를 넣고 졸이듯 익힌다. 이걸 고슬한 밥 위에 올려 덮밥으로 내놓으면 끝.

첫술을 뜨자마자 아내와 딸이 맛있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엄마보다 요리 잘하지?” 딸에게 물었다. “응, 아빠가 엄마보다 잘하네” 저녁 준비로 고생한 나에게 딸이 립서비스로 한 말이겠지만 액면 그대로 믿기로 했다. 나는 “요리를 배워 보고 싶어”라고 선포했다. 딸은 ‘아빠가 설마 요리를 배우러 가겠어’라는 듯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고, 아내는 “마음대로 해”라며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다음 날, 주말 요리 강좌를 신청하려고 집 근처 문화센터에 갔다. 하지만 문화센터 입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요리 실습하다가 엉뚱한 실수를 저질러 창피당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로 20년 가까이 수많은 여성을 상담했지만, 가운을 벗고 낯선 여성들과 함께 요리를 배우려니 무척 어색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몇 년 전 ‘사모님 우울증’이라는 책을 내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종종 했었는데, 그때마다 “부끄럽다는 마음을 떨치고 새로운 경험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합니다”라고 외치고 다녔더랬다. 그런데 정작 나는 요리 강좌 앞에 주눅 들고 말았으니, 역시 말만 갖고 되는 건 없나 보다. 직접 부딪혀 체험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껴야 인생이 풍성해진다.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경험 앞에서는 생각과 느낌은 옆으로 제쳐두고, 행동으로 저지르고 봐야 한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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