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한국교회 부흥 뒤엔 성경주석가들의 ‘골방작업’ 희생 있었다



한국교회 3대 주석가들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박윤선 목사의 '성경주석', 김응조 목사의 '성경대강해', 이상근 목사의 '신약주해' 표지



종교개혁의 격전 속에서도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는 한편 방대한 주석서를 썼다. 종교개혁의 모토가 '오직 성경'이듯이 올바른 교회개혁과 부흥을 위해서는 목회와 성경, 신학이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를 위한 신학자들 그리고 교회를 위한 성경 주석가들의 삼위일체적 협력 속에서 부흥을 이루었다.

평생 성경에 매달린 한국의 3대 주석가

칼뱅은 종교개혁기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교회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불철주야 성경주석에 몰두했다. 로마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난 1535년부터 제네바교회 사역을 마감한 1564년까지 무려 30년 동안 한 순간도 성경 주석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제네바의 성베드로교회에서 행한 정규예배 설교 외에 매주 성도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했으며, 제네바아카데미에서의 성경 강의를 집대성했다. 이것이 바로 ‘칼뱅주석’이다.

이와 유사한 성경주석 작업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일찍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박윤선 목사와 김응조 목사, 그리고 이상근 목사이다.

개혁주의 신학 관점 박윤선의 ‘성경주석’

정암(正巖) 박윤선 박사는 1905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4년 평북 신성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34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후 평양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강의하면서 1936년부터 성경주석 작업을 시작했다. 1938년 재차 도미해 모교인 웨스트민스터에서 성경 원어를 연구하고 귀국, 만주 봉천교회에서 목회와 성경주석에 전념하던 중 해방과 함께 월남했다.

그는 평양에서 옮겨온 장로회신학교 안에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자 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해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했다. 74년부터는 미국에서 성경주석에 몰두하다가 79년 귀국해 이듬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을 조직해 교육기관으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88년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박 목사의 주석 작업은 33세에 시작해 50년간 지속됐으니 그의 일생은 ‘한 권 성경’의 삶이었다.

‘박윤선 주석’(전 30권)의 특징은 성경을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점과 성경원어의 깊은 뜻을 파악해 원문에 충실한 강해를 했다는 점이다. 또 구한말 출생한 목회자로서는 드물게 풍부한 서구 신학의 지식 위에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점에서 교의학적으로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널리 영향을 끼쳤다.

복음주의 관점 김응조의 ‘성서대강해’

영암(靈巖) 김응조 박사는 1896년 경북 영덕에서 출생해 한학을 공부하다 한일합병 시기에 ‘기독교가 곧 구국의 길’이라 깨닫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1915년 미션스쿨인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2년여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8년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교단을 떠나 부흥사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성결교가 내분을 겪자 1961년 보수교단인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세우고 이듬해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를 개교했다.

김 목사가 성경주석에 착수한 것은 해방 후 서구신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가 자유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상황 속에서였다. 1950년대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수십 년 간 ‘성서대강해’(전 12권) 집필에 진력했으며 일생에 걸쳐 40여 권의 저서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96세를 일기로 1991년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영암 주석의 특징은 칼뱅신학의 노선에서 쓴 정암(박윤선) 주석과 달리 웨슬리신학의 노선에서 썼다는 점이며,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영적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또 성경강해와 함께 본문 중심의 ‘설교예제’를 제공했으며 말씀의 가르침에 따른 교훈과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문장이 고어와 국한문 혼용으로 돼있어 젊은 목회자들이 활용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현대문으로 고쳐진 개정판(전 24권)이 나오기도 했다.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은 이상근 ‘성경주해’

정류(靜流) 이상근 박사는 개혁신학과 성결신학으로 대조되는 위 두 주석가와 달리 비교적 후기에 신구약 전체의 집필(27권)을 완성했다. 1920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이 박사는 건강 문제로 독학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가을, 친구를 따라 처음 교회를 다녔으며 이내 새벽기도에 열심을 냈다. 그 무렵 철야기도를 위해 혼자 산길을 가다가 철조망에 넘어지는 사고로 발바닥에 철사가 박힌 채 평생 고통 속에 살았다 한다. ‘육체의 가시’(고후 12:7)를 지니고 일생 성경에 매달렸으니 그의 ‘성서주해’는 고통의 열매라 할 것이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시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 사건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일생의 좌우명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뉴욕신학교와 댈러스신학교에서 해석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주석을 시작했다.

1959년 대구제일교회 청빙을 받으면서 목회와 봉사, 그리고 성경주석이라는 3대 모토를 설정하고 1960년 ‘요한복음서 주해’ 출판을 시작으로 23년 만에 신구약 66권의 주해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근 주석의 특징은 이름 그대로 성경 전체를 강해(explanation)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본문을 풀이한 점에서 주석(commentary)과 동일하지만 설교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는 목회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앎으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을 집필 목적으로 한 것은 ‘성경주석의 목적이 교회를 위함’이라고 말한 종교개혁자 칼뱅의 생각과 일치한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주해는 한국교회 강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 3대 주석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교회의 부흥과 영혼을 구원하자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세 주석가는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성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위대한 종들이었다.

‘영성의 현장…’시리즈 마무리하면서

1년간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언을 드리고 싶다.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선대(先代) 목회자들의 노고, 이름 없는 성도들의 충성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음을 잊지 말자. 아울러 자만(自慢)과 자고(自高)와 자행(恣行·제멋대로 건방지게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이웃을 실망시킨 죄를 철저히 회개하자. 그리하여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과 복음통일을 실현하고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종말론적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을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종교개혁이 사회변혁을 가져왔듯이 오늘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일터를 제2 종교개혁의 현장으로 삼자.

글=김성영 목사 (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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