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경제인사이드] 통신망 속도 차별시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망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 폐기에 나서면서 업계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망중립성은 모든 인터넷 서비스가 통신망을 사용할 때 속도 및 접근성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통신망을 가진 사업자가 자사의 서비스를 더 빠른 속도로 제공하거나 타사의 서비스에 속도제한을 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경쟁 서비스라는 이유로 통신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없다.

FCC는 지난 18일 전체 회의를 열고 유무선 통신사업자 모두에게 망중립성 원칙을 적용하는 현재 통신법을 폐기하는 안을 예비 결정했다. 투표는 2대 1로 통과됐다. FCC는 총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현재는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을 포함해 공화당 몫 2자리, 민주당 몫 1자리만 채워진 상태다.

FCC는 8월까지 의견을 접수한 뒤 최종 표결을 실시한다. 결론이 바뀔 가능성은 없다. 공석이 채워져도 공화당 3명, 민주당 2명이기 때문이다. 파이 위원장은 “클린턴 시대의 가벼운 규제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면서 “변호사와 회계사가 아닌 기술자와 엔지니어가 온라인 세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이 위원장은 망중립성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망중립성을 고쳐 인프라 투자와 혁신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폐기되는 안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FCC가 통과시킨 ‘오픈인터넷규칙’이다. 법적인 문제가 없는 경우 망사업자가 타사 서비스를 차단해서는 안 되고(No Blocking), 속도를 제한해서도 안 되며(No Throttling), 추가적인 비용을 받고 속도를 높이는 것도 금지된다(No Paid Prioritization). 유선 인터넷망뿐만 아니라 무선 통신망까지 모두 적용된다.

망중립성은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IT 기업이 전 세계에서 강자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다른 건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서비스만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서비스가 있어도 인터넷에 제대로 노출시킬 수 없다면 구글, 페이스북 등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비스가 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서비스만 만들면 서비스를 유통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인이 구글, 페이스북 등을 쓰게 된 셈이다. 특히 데이터 사용이 많은 넷플릭스 같은 동영상 스트리밍(OTT) 업체는 망중립성 원칙의 가장 큰 수혜 업종으로 꼽힌다.

망중립성 원칙 재검토에 대해 업계의 입장은 첨예하게 나뉜다. 망을 직접 까는 케이블 사업자, 통신사 등은 전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 기업이 자신이 깔아놓은 유무선 망에 무임승차하며 이익을 가져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망 사용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계산해야 망사업자 입장에서도 투자할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 통신망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트래픽 관리를 해야 하고, 망 고도화를 통해 투자와 고용도 늘려야 한다는 논리도 편다.

반대로 인터넷 사업자와 시민단체들은 망중립성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특히 통신 사업자가 인터넷 기업에 쾌적한 통신망 사용을 대가로 ‘급행료’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통신사가 직접 제공하는 서비스는 사용자의 데이터 사용량을 차감하지 않거나 요금을 감면하는 ‘제로 레이팅’을 도입할 수도 있다. IT 기업으로선 통신망 비용 부담 때문에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대로 선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IT 기업은 그나마 영향이 덜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큰 회사들은 급행료를 내고라도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할 수 있는 반면 스타트업은 그럴 여력이 안 된다”면서 “인터넷 권력이 아마존,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으로 더욱 공고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망중립성 원칙하에서는 아이디어 하나로 앱을 개발해 대박을 내고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지만 새로운 규정이 생기면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 등을 연출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FCC에 서한을 보내 “인터넷은 큰 회사들이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망중립성 원칙을 훼손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코폴라 감독은 “대규모 제작사에 의한 영화의 획일화는 이미 목도하고 있는 현상”이라며 “망중립성 원칙이 훼손되면 예술과 사업의 균형은 더욱 지키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런 환경에서는 과거에 내가 만든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덧붙였다.

향후 망중립성 결론이 IT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은 낮다. 오바마 행정부와 IT 기업은 밀월관계였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처음부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고용을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인 고용보다 해외 인재 유치에 열을 올리는 IT 기업에 우호적일 이유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신사에 유리한 쪽으로 망중립성 원칙을 바꾸고 대신 투자와 고용을 늘리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망중립성 원칙을 바꾸게 되면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과거 몇 차례 업체 간 충돌이 있었으나 현재는 망중립성 원칙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통사들이 제로 레이팅 서비스를 잇달아 들고 나오면서 망중립성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LG유플러스는 지니뮤직 음원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 ‘유플러스 지니뮤직 마음껏 듣기’를 선보였다. 별도의 데이터요금 없이 월 7700원(모바일 전용)의 요금만 내면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사용료는 통신사에서 부담하는 제로 레이팅 서비스다. 앞서 SK텔레콤은 한시적으로 ‘포켓몬고’ 이용 시 데이터 이용료를 내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역시 제로 레이팅으로 볼 수 있다.

제로 레이팅은 망중립성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기 때문에 새 정부가 망중립성에 대해 어떤 방향의 정책을 설정하는지가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기간 동안 망중립성 강화를 주장했다. 그는 “네트워크 접속은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앞으로 통신 정책은 망중립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망중립성을 어떻게 수정하느냐에 따라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글=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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