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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제자가 쓴… 아, 피천득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224쪽)

금아 피천득(1910∼2007)은 이런 예찬론을 펼칠 만큼 수필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사람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도 수필 문학의 대가다.

수필 외에도 뛰어난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피천득의 면모를 보여주는 평전이 사후 10년 만에 나왔다. 평전의 저자는 서울대 사대 영어과 교수 시절 제자였던 정정호(68·사진) 중앙대 명예교수다.

평전은 딱딱하지 않고 이야기를 읽듯 부담이 없어 마치 피천득의 삶과 문학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준다. 책은 생애, 사상, 작품론 분석 및 비평의 3부로 구성돼 있다. 정전 비평가로 유명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영국 문인 새무얼 존슨의 평전 쓰기를 벤치마킹했는데, 존슨은 생전 스승이 극찬했던 대비평가였다.

그에게 스승 피천득은 ‘시인-수필가-번역문학의 삼중적 능력’을 가진 문인이다. 그래서 수필가로서만 대중에게 각인된 피천득의 문학적 업적을 시와 번역의 영토로 확장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처음으로 문단에 내놓은 작품이 1930년 동아일보에 실린 시 ‘차즘(찾음)’이며, 이보다 먼저 1926년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테의 단편 ‘마지막 소설’을 번역해 동아일보에 연재한 일 등 묻혔던 사실들을 캐내 풍성하게 내놓는다.

피천득은 각각 7세, 10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던 고아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문학계에 우람하게 설 수 있었는지 인생사를 통해 보여준다. 그의 문학적 재질을 눈여겨본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과 각별한 사랑, 춘원의 권유로 떠난 상하이 유학, 거기서 접한 미국식 대학 교육,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 1926년 17세에 유학가기 전 춘원의 집에 유숙하며 그로부터 영어와 영문학에 대해 배웠으니 피천득의 문학적 뿌리는 이광수에 뻗어있다.

정 교수는 제자이기에 필자로서의 한계를 언급하며 “금아 찬양집으로 끝난 듯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피천득의 삶과 문학을 균형 있게 보여주려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특히 스승의 문학 세계를 평가하는데 있어 여러 인용들을 언급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정작 저자는 스승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의 글 고랑은 따뜻하다. 뜨겁지 않은 조춘의 지열이 느껴지고 포근하다.” 저자는 피천득의 시와 수필을 ‘정(情)의 문학’이라고 정의하면서 피천득의 글에서 우리가 얻는 평안함이 그의 글에 저자의 권위가 죽어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도 절차탁마의 언어는 무서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고.

뿐인가. 피천득은 시와 수필을 각각 100편 내외만 창작한 과작의 문인이기도 하다. “언어가 우리의 존재의 감옥이라면 피천득의 서정 문학은 그 감옥을 탈출하는 열쇠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말이 넘쳐나는 시대, 그래서 피천득을 다시 읽을 것을 권하며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다. 책 곳곳에 실린 피천득의 작품을 읽는 것도 묘미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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