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스페셜/월드] 늘리느냐 줄이느냐 노동시간 줄다리기



길게는 11일까지 쉴 수 있는 5월 황금연휴가 지나가고 있지만 노동의 ‘부익부 빈익빈’에 한숨이 나온다. 대기업 직원과 공무원 등 일부 직장인은 달콤한 휴가를 선물 받았지만 중소기업 직원, 특히 비정규직에겐 그림의 떡이다. 노동의 양극화는 상대적 박탈감은 물론 일의 능률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많다. 대선 주자들이 수년 전부터 ‘저녁이 있는 삶’ ‘쉼표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들고 나선 이유일 게다. 여기에 4차 산업혁명이 예고하는 일자리의 재편은 노동의 미래에 물음표를 더한다.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일해야 하는가’는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일과 삶의 양립, 경제 성장과 일자리 나눔을 위해 노동시간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복지천국’ 북유럽의 실험

노동시간 단축은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 창출을 불러온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노동시간을 선진적으로 줄이고 있는 나라는 복지천국이라 불리는 북유럽 국가다. 주 4일 근무, 하루 6시간 근무제를 속속 도입하며 삶의 질을 높이려 한다. 덴마크에선 주 4일 근무제가 정착단계다. 쉼과 여유를 추구하는 이들의 삶은 세계적으로 ‘휘게(Hygge·안락하고 아늑한 상태) 라이프’라는 트렌드까지 불러왔다.

스웨덴에선 ‘하루 몇 시간 일해야 가장 효율적인가’를 주제로 2015년 2월부터 23개월간 실험을 진행했다. 예테보리시는 정부 지원을 받아 시청과 병원, 양로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루 6시간 주당 30시간만 일하는 팀과 기존대로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을 일하는 팀으로 나눠 만족도와 능률성 등을 조사했다.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성과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했다.

지난달 2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급여를 줄이지 않고 근무시간을 하루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인 노인요양원 직원의 경우 하루 2시간 노동 감소로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행복도가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또 건강하다는 인식도 높아졌다. 예컨대 6시간 근무자가 병가를 낸 일수는 이전보다 4.7% 줄어든 대신 8시간 근무자 그룹에선 병가일수가 62.5% 증가했다. 노동시간의 단축이 노동 연한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전문가 진단도 나왔다.

한편으론 예상보다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평가도 있다. 근무시간이 줄면서 신규 채용한 인원에게 지급한 임금 등 1200만 크로나(약 15억7000만원)의 추가 비용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논쟁 속에서 정부 차원의 6시간 근무제 도입은 무산됐지만 민간기업 차원에서는 확대, 유지되는 추세다.

프랑스 들쑤신 노동시간 논쟁

지난해 프랑스를 들쑤신 것 또한 노동시간 논쟁이었다. 노동장관의 이름을 딴 노동법 개정안 ‘엘 코므리법’이 긴급 사안으로 분류돼 표결 없이 통과되면서 분열과 대립 국면이 이어졌다. 개정안은 주 35시간 근로제 틀 안에서 주당 46시간, 예외적인 경우 최대 60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초과근무수당 할증률을 줄여 긴급한 업무를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방침을 세웠다. 노동시간을 늘려 경제 위기를 돌파해 보겠다는 취지였지만 시민 수만명은 6개월 이상 강경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다.

오는 7일 프랑스 대통령 선거의 최대 이슈 중 하나도 노동시간이다. 이번 대선에서 59년 만에 공화·사회당 양당 체제가 무너진 것 또한 이 노동시간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가장 유력한 승자로 꼽히는 중도신당 앙마르슈의 에마뉘엘 마크롱(39) 후보는 친기업 성향으로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노동시간을 신축적으로 운영하고 초과근무를 허용해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선투표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63) 후보는 현행 주 35시간 노동을 39시간으로 늘릴 것이라고 공약했다. 두 후보는 노동시간 감소가 예상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데다 고령자의 은퇴를 앞당기고 기업가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마크롱의 경쟁자인 극우 국민전선(FN) 마린 르펜(48) 후보는 노동시간을 기존처럼 주당 35시간을 고수해 블루칼라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폭발적 지지를 받고 있다. 대신 은퇴 연령을 낮추고 초과근무수당에 세금을 물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막판 돌풍을 일으켰던 좌파당 장뤼크 멜랑숑(66) 후보는 노동시간을 주 32시간으로 단축하겠다는 공약을 내놨지만 결선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마크롱 등의 ‘노동시간 역주행’은 만성적 경기 침체에서 비롯됐다. 10%대까지 치솟은 실업률이 떨어지지 않자 아예 핸들을 꺾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프랑스인의 선택에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과로사 일본, 주 4일제 도입 움직임

일본은 2015년 12월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당시 24)씨가 장시간 노동을 하다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 뒤 노동시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다카하시씨의 1개월 잔업만 105시간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지난달 18일에도 매월 30시간씩 야근하다 뇌경색으로 사망한 40대 남성이 3년간 공방을 벌인 끝에 과로사로 인정받았다.

일본 정부는 지난 3월 1947년 노동기준법 제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처벌 규정이 부여된 시간외 노동 규제 조항 등이 포함된 노동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그간 주 40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시간외 노동은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 제한했지만 위반 시 처벌 규정이 없었고 노사합의 시 시간외 노동시간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었다. 이번 개혁 방안엔 시간외 노동시간을 연 360시간 이하로 제한하고 노사 합의가 있을 경우 연 720시간까지만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일자리 나눔과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저출산과 소비 촉진의 해법으로도 꼽힌다. 포털 사이트 야후재팬은 지난해 말부터 전 직원 5800여명을 대상으로 주 4일제를 도입했다. 패밀리마트와 KFC도 일정 조건을 갖춘 직원을 대상으로 주 4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은 지난해 8월부터 주 4일제를 도입하면서 임금이나 복지 혜택을 동일하게 유지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한국이 2113시간으로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가장 적게 일하는 국가는 독일로 1371시간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1482시간, 일본은 1719시간이다. 한국은 이 같은 ‘노동지옥’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 특히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해 적정 노동시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더 활발히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글=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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