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금미의 시네마 패스워드-영화 ‘지니어스’] 간결함 속에 진실이 있다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빨강, 하양과 파랑 아래서’ 또는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1925년 미국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며 붙였던 제목들이다. 글의 첫 인상이 될 제목을 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유능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간파했다. 고집스런 저자와 오랜 실랑이를 벌인 끝에 마침내 ‘위대한 개츠비’라는 산뜻하고 함축적인 제목을 뽑아낼 수 있었다.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이 작가의 끈질긴 바람대로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물론 작품에 담긴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 세계 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걸작들의 명성 이면에는 날카로운 감식안을 지닌 편집자의 공로가 숨어있다. 13일 개봉한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는 이처럼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 등의 원고를 다듬어 보석 같은 작품들로 탄생시킨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대공황 직후의 음울함과 자유분방한 재즈의 선율이 공존하던 30년대 뉴욕 풍경 위로 풍성한 문학적 레퍼런스가 펼쳐진다. 콜린 퍼스, 주드 로, 니콜 키드먼 등 탁월한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는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미국 현대문학의 산실 스크리브너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퍼킨스(콜린 퍼스)에게 어느 날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원고가 들어온다. 이미 여러 곳을 돌며 퇴짜 맞은 소설이지만 독창적 문체에서 잠재력을 발견한 그는 출판을 결정한다. 스스로를 셰익스피어의 희곡 ‘태풍’에 등장하는 악마의 자식 칼리반에 비유하는 괴팍한 신인 작가와의 힘겨운 교정이 시작된다. 간결하게, 더 간결하게! 장황한 수사들을 모두 걷어내고 알맹이만 남기기 위해 맥스는 무자비하게 붉은 줄을 긋는다. 서너 장의 원고는 단 한 줄의 문장만 남긴 채 지워진다. 토머스 울프(주드 로)의 데뷔작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가 탄생하게 된 과정이다.

첫 소설의 성공 이후 울프는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을 안은 채 글쓰기에 병적으로 몰두하게 된다. 쉴 새 없이 문장을 쏟아내던 그는 얼마 후 맥스에게 수천장의 초고를 가져온다. 맥스는 가족들조차 뒤로 한 채 이 지난한 작업에 기꺼이 동참한다.

“톨스토이가 널 만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야. 그랬다면 ‘전쟁과 평화’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 거침없이 원고를 쳐내는 맥스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한 울프는 소리를 지르고 만다. 소설 한 편에 미국의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야망을 가진 울프에게 맥스는 조언한다. “큰 주제를 다루되 핵심을 이끌어내라. 본질에 다가갈수록 언어는 간결하고 명료해질 것이다.”

갑작스레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말들이 흘러넘친다. 늘 그렇듯, 거창한 공약과 슬로건을 감싸고 있는 모호한 정치적 수사들 속에서 알맹이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간결하고 명쾌한 촌철살인의 언어에 대한 갈증은 커져간다. 그러나 모든 간결함이 곧 선은 아니니, 때론 ‘전쟁과 평화’를 찬찬히 읽어야 할 필요도 있는 법. 냉철한 편집자가 되어 말과 글을 솎아내 더 좋은 이야기로 완성시킬 일만 남았다.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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