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불신·의심의 철조망 저 너머에 구원과 자유

경남 거제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둘러쳐진 철조망. 북한군 전쟁포로들은 철조망을 바라보며 철조망 너머의 세상을 매 순간 갈망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MP 다리. 포로 출입의 주요 관문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전시된 전쟁포로들 사진. 맹의순이 있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현재 남아있지 않아 당시 전쟁의 실상과 포로들의 상황을 볼 수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복원된 포로용 천막.
 
소설가 정연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름다운 청년’ 맹의순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맹의순은 6·25 한국전쟁 당시 피란길에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병든 포로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실존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친구들과 포로수용소 환자들의 증언,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정연희(80) 작가에 의해 1983년 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로 출간됐다.

지옥으로 보내주소서

주인공 맹의순은 이렇게 말한다. “내 본심을 말하면, 내가 괜히 위선 떠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기 포로수용소가 참 좋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이 참 많다. 내가 그 어른과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이런 기도가 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에 들여보내 주시든지…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어 고통 받는 저들을 위로하게 하옵소서!’ 물론 이곳은 지옥이 아닐세. 나를 필요로 하는 이곳에 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르겠네. 아니 저 철조망 밖 삶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그러니 나를 그만 놔두게, 여기서 이 분들을 섬기도록(51년 8월).”

친구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석방이 확실시되자 맹의순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친구들에게 보냈다. 조선신학교를 다니며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섬겼던 그는 억울함과 분노 대신 은혜를 택했다. 고통은 인간의 존재를 뚜렷하게 만드는 듯했다. 전장에서 다리가 끊기고 팔을 잘리고 눈을 잃어버린 이들이 포로가 돼 갇힌 곳. 그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고통에 묶여 있는 포로였고, 공포에 갇혀 있는 포로였으며, 슬픔과 외로움에 감금당한 포로였다. 맹의순은 밤마다 흐느끼는 이들에게 시편 23편을 읽어주며 간호를 했다.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손을 놀리네. 더러는 두꺼운 패드를 갈아대고, 피고름이 흐른 것을 닦아내며 저리고 아파하는 부분을 주무르지.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몸을 놀려 순종하는 것뿐일세. 한 사람 한 사람 순서가 바뀔 때마다 소독약으로 정성껏 손을 닦아 내고, 어느 때는 따뜻한 물로 낯을 씻어 주고 소리 내어 기도하면, 주르르 몇 줄기 눈물을 쏟던 끝에 혼곤히 잠이 드는 것을 볼 수가 있다네.”

슬픔과 외로움의 포로

50년 7월 한국군과 유엔군은 지금의 부산경찰청 자리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급속하게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이후 부산의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단계적으로 이송됐다. 맹의순은 50년 9월∼52년 8월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석방 하루를 앞둔 8월 11일 과로로 숨졌다.

현재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남아 있지 않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유적공원으로 조성돼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국전쟁 3년의 기록을 담고 있는 이곳을 최근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17만3000명을 수용했던 유적공원 한쪽에 자리한 잔존 유적지(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99호)에서 경비대장 집무실, 경비대 막사, PX, 무도회장 등과 당시 사용하던 건물 일부를 볼 수 있다.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입던 옷을 비롯한 생활용품 무기 각종 기록물과 영상자료 등은 포로수용소 유적박물관에 있다.

어둠만 머물고 있는 포로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손바닥만큼 열려진 틈으로 빛이 따라 들어왔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은 맹의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포로들의 천막에는 전등이 없네. 밤이면 천막 입구에 보초를 서는 자리에만 손전등이 지급되지. 그러나 천막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어둠을 즐기는 듯했네. 어둠 속에서 갖가지 음식을 맘 놓고 그려보고 생각 속에만 가둬 놓았던 것들을 마음대로 풀어놓아 어둠 속을 다채롭게 하는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네.”

그는 일과 후에 자유롭게 병사 천막을 다니며 전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병동 천막심방을 했다. 나중엔 천막으로 광야교회를 세우고 포로들의 영혼을 보살폈다. 처음엔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다가 나중에 중공군 포로들 중 환자들까지 돌봤다.

“그들의 잠든 모습을 굽어보면 나는 눈물을 흘리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인하며 모든 것이 너무도 감사해서 솟는 눈물이라네. 참혹한 눈물의 자리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비참을 당신의 눈물로 씻기시고 계신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는 이 깨달음의 은혜가 너무도 기뻐서 나는 계속 울면서 일을 하게 된다네.”

거제도 포로수용소 철조망 앞에 서니 거제 시가지가 보였다. 그 철조망 밖의 길은 포로들이 가족들이 있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라봤을 것이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 친공포로와 유엔군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포로들은 이념 갈등이 없고 육체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철조망 너머의 세상을 매 순간 갈망했을 것이다

“이곳 철조망은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다네. 그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가시 철망이 둘러져 있는 울타리 속에서 포로들은 또 하나의 인간사회를 형성하고 있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웃긴 풍경은 그들 스스로를 묶는 철조망 가설작업을 하는 것인데, 그들은 감시를 받으며, 더 단단히 더 철저하게 철조망을 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일하고 있다네.”

맹의순은 죽어서야 수용소를 나갈 수 있었다. 빈 관을 싣고 찾아간 친구들은 수용소 본부에서 허망하기 그지없는 설명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여기서 나가지 못한 채 죽었으니 포로를 면할 수는 없어요. 해운대에 있는 유엔군 묘지 근처에 포로묘지가 있다는 말만 들었어요. 이 안에선 산 사람 일도 어쩌지 못하는데 죽은 사람이야 뭐, 간단히 비닐에다 둘둘 말아서 싣고 떠나더니 떠났던 차가 금방 옵디다. 쓰레기 버리듯이 했겠죠.” 목숨이 다한 포로를 둘둘 말아서 간단하게 담는다는 비닐봉지. 맹의순의 편지에도 있었던 이야기였다. “군용 앰뷸런스에 실려 해운대 근처 유엔군 묘지가 있는 근방에 따로 마련된 포로들만의 무덤에 간단히 묻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맹의순은 자신이 눈물로 임종을 지켜준 포로들이 떠나간 그 길을 따라 갔다.

‘우린 천사를 보았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은 맹의순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선생은 새벽 한 시, 두 시면 늘 병동에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도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시달리는 그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들 앞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하늘에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는 다 그의 얼굴을 보며 그 말씀을 따라 외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생은 마지막 환자들 씻겨낸 물통과 대야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 순간 먼 곳을 바라보시던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셨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갇힌 분노,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 수고 등 별로 감사할 제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지를 묻는 듯 했다.


[정연희처럼 생각하기]
“내 믿음을 기독교라 않는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일 뿐”


소설가 정연희(사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에 문학이란 독특한 무늬를 그려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믿음을 종교라 부르지 않는다. 기독교라고 이름하지도 않는다. 생명이신 분, 사랑이신 분,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일 뿐. 그리고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을 해결해 주신 예수, 그분의 십자가를 의지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가 얼마나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두고 분석하고 예수 그분의 십자가를 두고 이론에 이론을 태산처럼 쌓아가도 나는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의 신비와 사랑을 목숨 다하여 의지할 뿐이다.”(산문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중에서)

그는 은혜받기 이전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이전에 갖지 못했던 문학의 조화를 찾았다고 말했다. “영혼의 씨눈이 벗겨지자 내 죄가 보였다. 영혼의 씨눈이 떨어지자 생명의 존귀함이 보였고 창조의 아름다움이 보였으며 이웃이 보였다.”

그는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파류상’으로 등단한 후 1980년대 초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소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후 선교 100주년을 맞아 선교사들이 만리타국에서 가지고 온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들은 이 땅에 목숨을 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양화진’(1984), 물질숭배와 도시화의 그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난지도’(1985), 복음의 그루터기로 남은 순교자의 삶을 조명한 ‘순교자 주기철’(1997) 등을 발표했다. 기독교 윤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뤘다.

그는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을 맡았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유주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동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현재 경기도 안성 ‘삼희동산’에서 창작과 묵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제=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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