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제2의 종교개혁 이끌 ‘21세기 루터’ 키우는 ‘유니온 신학과정’

영국 웨일스에 있는 유니온신학교 전경으로 유럽 복음주의 신학의 산실이 되고 있다.
 
150년 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교회 전경.
 
하노버교회 역사관에 토마스 선교사 사진과 기념비가 설치돼있다.




올해는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지 15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9월 한 국내 교회의 후원으로 영국 웨일스에서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집회가 열렸고, 많은 성도들이 토마스 선교사가 성장하고 파송 받은 하노버교회를 방문했다. 하노버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가 37년간 목회한 곳이고 토마스도 9세 때부터 이 교회의 사택에서 자랐다. 17세 때에는 강단에서 첫 설교를 했다. 토마스의 부친은 아들의 순교 이후 18년간 더 교회를 섬기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흘라노버가 낳은 수재

필자도 웨일스의 신학교와 그곳의 여러 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수차례 하노버교회를 방문했다. 교회는 웨일스의 수도인 카디프에서 30여분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인 흘라노버(Llanover)에 있다. 한 젊은이가 이렇게 먼 곳에서 어떻게 조선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결정을 내려준 토마스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기록을 보면 토마스 선교사는 재능이 많은 뛰어난 청년이었다. 14세 때 옥스퍼드 지저스 칼리지의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됐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추천으로 의사가 되려고 준비했으나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일보다 영혼을 고치는 일을 위해 런던대 뉴칼리지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줄곧 장학생으로 뽑혔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 등 언어에 두각을 보였다. 그러다 중국선교에 대한 강력한 부르심을 확신했고 결혼 7주 만에 신부 캐롤라인과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내는 출산 도중 사망했고 토마스는 그 충격으로 잠시 선교지를 떠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을 만나 그곳에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866년 조선 땅에 오게 됐다. 하지만 성경 몇 권만을 전한 후 “야소, 야소(예수, 예수)”를 외치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만다.

참담한 유럽의 현실

유럽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는 필자가 간절히 꿈꾸는 것이 있다. 유럽에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 제2, 제3의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유럽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의 쇠퇴로 교회 안에서 제대로 성경을 연구한 젊은 세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여파로 유럽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명맥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신학교는 있지만 신학공부를 위해 수천만원에 이르는 학비를 지불해야 하는 현실도 큰 장벽이다.

서울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는 2008년 창립 30주년을 맞이해 ‘복음의 서진’ 사역 비전을 선포했고 그 첫 시도로 토마스 선교사의 고향인 웨일스의 신학교를 후원키로 했다. 2011년 2월 웨일스 유일의 복음주의신학교인 ‘웨스트(WEST·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와 협약을 맺음으로써 그 첫 삽을 떴다.

이후 영국에서 촉망 받는 젊은 신학자인 마이클 리브스 박사가 웨스트의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 변화가 시작됐다. 리브스는 30세가 되기 전에 케임브리지대에서 교회사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뛰어난 학문성을 인정받아 세계 유수의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영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인 UCCF(한국 IVF의 모단체)에서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0년간 UCCF에서 학생들과 선교단체 간사들을 훈련시키고, 옥스퍼드대를 중심으로 신학 강좌를 개설해 세계 최고의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 치열한 논쟁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사역도 펼쳤다. 그러던 중 영국교회와 유럽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함을 실감했다. 이러한 비전을 펼치기 위해 유니온(UN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신학교육 과정을 제시하며 웨스트에 합류했다.

성경과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으로

현재 유니온은 온라인 강좌와 오프라인 교육이 어우러진 훈련 공동체를 구축, 깊이 있는 성경 연구와 신학적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온라인 과정을 통해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세계 최고 석학들의 강좌를 이수토록 했다. 오프라인에서는 지역 교회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통해 설교와 상담, 목회 전반에 걸친 노하우를 전수함으로써 유럽교회를 섬길 리더들을 배출하고 있다. 리브스 박사는 칼뱅이 제네바에서 신학교를 세워 각 나라의 종교개혁을 일으킬 선도자들을 배출한 모델을 연구했다. 이를 유니온에 적용해 ‘21세기의 제네바신학교’가 되도록 하는 게 그의 꿈이다.

유니온 사역은 유럽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유럽 재복음화를 위해 일해 오던 오엠유럽선교회는 유럽 청년들을 훈련시킬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유니온을 선택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럽 20여개국 지부 안에 유니온의 훈련 공동체를 개설해 젊은이들을 성경으로 무장토록 하고 있다. 이 외에 영국 리버풀과 사우스햄튼, 노폭, 옥스퍼드, 버밍햄 등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이탈리아 로마와 그리스 아테네, 핀란드 헬싱키 등지에서도 교회개척 등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제3의 선교패러다임, 현지 선교

유럽선교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선교는 복음을 접해보지 못했던 지역에 선교사들이 찾아가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의료시설과 교육시설을 확충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인 유럽은 1000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각 나라와 민족, 그리고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가 존재해 왔다. 영국만 해도 현재 세계 신학을 선도하는 석학들이 즐비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감사한 것은 아직까지 유럽 안에 그루터 같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힘을 합쳐 스스로 교회 개척을 주도하는 것이 가장 큰 사역의 원칙이 되고 있다. 이른바 제국주의식 선교로 오해 받는 서구식 선교나 한국식 ‘나 홀로’ 선교는 지양돼야 한다.

지금은 단체와 교회 이름을 내려는 시도는 철저히 배격하고 묵묵히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유럽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직접 선교를 이끌도록 격려하는 것이 유럽 재복음화의 열쇠임을 지난 몇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수많은 난민과 이주노동자, 유럽 거주 무슬림 그리고 유학생들을 보면 유럽은 가장 효율적인 선교지임에 분명하다. 유럽교회가 살아난다면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추수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선교는 하나님이 맡기신 시대적 과업이다. 잘못된 교리와 관습, 온갖 부정과 부패 때문에 교회가 힘을 잃고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일으켜 새로운 부흥을 허락하셨다. 이러한 유럽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다시 한 번 우리 세대에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자. 그 일을 위해 쓰임 받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글·사진=고성삼 목사(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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