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한반도까지 복음 전한 부흥의 땅, 지금은 인구 3%만 주일예배

영국 웨일스 부흥의 출발점이 됐던 스완지 글레베로드 66번가의 모리아교회 전경. 공식 이름은 ‘모리아 칼뱅주의적 감리교 예배당(장로교)’으로 건물 왼쪽이 교육관.
 
1904년 10월 31일 밤 18명의 청년들이 기도회를 시작한 모리아교회 교육관 내부.
 
교육관에 전시된 웨일스 부흥 이야기를 담은 책자.
 
대부흥 불 지핀 에반 로버츠
 
고성삼 목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영국 웨일스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150년 전 조선을 찾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린 토마스 선교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웨일스 기독교 역사는 1500여년간 이어져왔다. 그러나 정확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문서 자료가 부족한 데다 중세 역사가들이 전승한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어서 사료에 바탕을 둔 재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5세기 초까지 로마제국이 영국 전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 공인(313년) 이후 자연스럽게 웨일스에 기독교가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웨일스에 본격적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른바 ‘성자들의 시대’라고 알려진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켈틱(Celtic) 수도사들의 선교활동을 통해서다. 켈틱 수도사들은 성경에 능통했으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복음 전파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웨일스인들의 신앙 교육뿐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과 학문을 전해주었다.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는 바로 켈틱 수도사들이 만들어 불렀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웨일스 전반에 확대되면서 웨일스의 켈틱 기독교 전통은 쇠퇴했다.

방해를 뚫어낸 부흥

이후 웨일스의 기독교는 1700년대까지 주목할 만한 개혁과 부흥을 맞지 못했다. 웨일스는 종교개혁의 주무대였던 독일이나 스위스와는 지리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대학이나 상업 중심 도시도 없는 소규모 농촌 마을밖에 없다 보니 대륙의 개혁운동은 강 건너 불이었다. 웨일스는 영어가 아닌 자국어(Welsh)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언어적 장벽도 개혁 불길의 웨일스 유입을 막았다.

1536년과 1543년 두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합병이 진행된 이후 웨일스 교회들은 모두 잉글랜드 왕을 교회의 머리로 섬기는 국교회에 편입됐다. 이후 1588년 윌리엄 모건에 의해 신구약 성경이 웨일스어로 번역돼 웨일스인들은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웨일스인들은 자신의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많은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웨일스 기독교의 본격적 부흥은 위대한 사역자들이 출현하면서다. 조지 윗필드 등과 함께 열정적인 복음 증거자로 사역한 하웰 해리스를 비롯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인정했던 대니얼 롤란드, 그리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찬송가 377장) 등을 지은 위대한 찬송 작가인 윌리엄 윌리엄스가 동일한 시기에 웨일스 부흥을 위해 쓰임을 받았다.

웨일스의 영적인 리더들은 웨슬리 형제의 신학적 입장과는 달리 칼뱅의 가르침에 입각해 신앙운동을 펼쳐나갔다. 소위 ‘칼뱅주의적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s) 운동’으로 일컬어진다. 엄격한 신앙생활 혹은 훈련 규율을 일컫는 ‘감리교(Methodism)’의 어원처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제어하고 훈련시켜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신앙 본질로 삼았다.

하웰 해리스는 윗필드나 웨슬리 형제보다 먼저 야외 설교와 전도 여행을 시작해 18세기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영혼들을 깨웠다. 웨일스어 성경은 롤란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렸다. 윌리엄스는 성경 진리에 입각한 놀라운 표현들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찬송가를 지었다.

웨일스 대부흥과 에반 로버츠

웨일스는 1762년 이후 100년 동안 최소 15번 이상의 크고 작은 부흥을 경험했다. 그 결과 교회는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교회학교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기도와 성경통독 모임은 수없이 많았고 영적 경험을 나누는 소그룹 모임들은 붐볐다. 이 같은 영적 부흥은 1904년 웨일스의 한 청년인 에반 로버츠에 의해 다시 한 번 피어오른다.

어린 시절 광산과 대장간에서 험한 일을 하며 생활한 에반 로버츠는 24세가 되던 해에 신학교에 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신학교 입학을 위해 예비학교(Grammar School)를 다니던 중 그는 복음 증거자인 셋 조슈아의 집회에 참석해 그의 설교를 듣고 강력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그에게 임했다. 바로 자신이 경험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고향 친구들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밤, 당시 출석하던 모리아교회 목사에게 허락을 받고 18명의 친구들과 함께 기도회를 시작했다. 기도회는 11월 10일까지 모리아교회에서 밤마다 계속됐고 평균 8∼9시간씩 이어졌다. 18명으로 시작한 기도회는 나중엔 예배당 출입문과 로비, 심지어 교회당 밖 창문 앞까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할 정도로 확대됐다. 이 소식을 접한 웨일스 성도들은 에반 로버츠에게 자신들의 교회에도 방문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기도회가 열리는 곳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회개와 자복, 능력이 임했다. 웨일스 부흥의 소식은 여러 나라에도 전해져 스코틀랜드와 인도, 미국의 아주사 그리고 1907년 한국의 평양까지 이어졌다.

웨일스교회의 쇠퇴에서 배운다

부흥의 땅이었던 웨일스의 현재는 어떨까. 인구 300만명 중 3%만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고 성도 대부분이 70세를 넘긴 노년층이다. 그동안 노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고 이에 따라 교회도 문을 닫게 되었다. 문 닫은 교회 중엔 더러는 음식점으로, 더러는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고 있다. 1904년 부흥의 진원지였던 모리아교회는 아직 남아있지만 담임목사 없이 10여명의 성도들만 모이는 실정이다.

어떻게 한때 영광스러운 부흥의 중심지가 이제는 선교지로 전락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웨일스 사역자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그들의 대답을 요약한다.

첫째, 세속사회가 제기한 질문들에 교회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교회가 비이성적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그 결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기독교 문화가 확산됐다.

둘째, 에반 로버츠는 성경을 깊이 연구한 목회자가 아닌 신학을 준비하던 신자였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기반으로 한 메시지보다는 기도와 찬양으로 감성을 자극하고 체험 위주로 접근했다.

셋째, 개인주의 문화가 유럽을 휩쓸며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보편화 됐는데 교회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 문화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렵게 됐다.

넷째, 1·2차 세계대전에서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많이 전사하고 교회들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영국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특히 세계선교를 이끌던 도전정신을 상실한 채 그저 교회 유지에 급급한 태도가 웨일스 교회의 급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을 구가했다. 그리고 이제 급속한 쇠락을 우려하고 있다. 웨일스교회의 부흥과 쇠퇴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글·사진=고성삼 목사(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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