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사랑하는 사람 잃고, 하나님 슬픔 알았다

강원도 양양 낙산 바닷가 모래사장에 황금찬 시인의 시 제목 ‘별과 고기’란 글씨가 쓰여져 있다. 아래 사진은 낙산도립공원에 세워진 ‘별과 고기’ 시비. 속초가 고향인 시인은 ‘동해안 시인’으로 불린다.
 
황금찬 시인 생가 인근 속초 청초호의 모습이다.
 
강원도 속초시 황금찬 시인 생가 마을의 현재 모습.
 
황금찬 시인
 
황금찬 시인이 1955년부터 출석한 서울 초동교회.


“촛불!/심지에 불을 붙이면/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출발하는 것이다/어두움을 밀어 내는/그 연약한 저항/누구의 정신을 배운/조용한 희생일까/존재할 때/이미 마련되어 있는/시간의 국한을/모르고 있어/운명이다/한정된 시간을/불태워 가도/슬퍼하지 않고/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춤추는 불꽃.”(‘촛불’ 전문)

100년의 시간동안 시인의 ‘어진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슬프지만은 않았다. 암담한 일제시대와 6·25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었지만 촛불과 같은 ‘어두움을 밀어내는 연약한 저항’으로 한 세기를 바람처럼 살아왔다. 올해 백수를 맞은 황금찬(99) 시인. 그는 신앙과 사랑의 서정을 겸비한 ‘화해의 시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외로운 시간을 보낼 때도 “시는 영혼을 구제하는 양식이며 세상의 난폭성을 없애려면 반드시 시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를 썼으며 시를 사랑했다.

내 고향 속초

“그 어머니 곁엔/눈물이 가득한/자식이 있어야 한다/떠나지 말거라/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45/지금은 속초시 논산동이다/나는 거기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어머님이 가꾸시던 미나리 밭엔/나비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고향’ 중에서)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 45. 그의 ‘고향’이란 시에 나온 주소를 들고 시인의 생가 터를 지난 12일 찾았다. 100년 전의 마을을 상상했다. 그 시절 그곳은 농촌이었다. 마을 북쪽 함지고개를 둘러싼 작은 농촌에 30호의 농가가 있었고 그중 가장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 시인의 집이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아들의 어진 눈을 바라보며 “금찬아. 너는 언제나 물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야 좋은 사람이지”라고 말한다. 소작농이셨던 부모님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가솔을 이끌고 함경북도 성진으로 향했다. 그가 8살 때였다.

옛 주소지에서 변경된 새 주소는 속초시 조양동 983. 옛 집은 흔적조차 없고 아파트와 교회, 유치원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인근에 시인이 자주 들렸다는 청초호를 찾았다. 멀리 실향민들의 정착촌 아바이마을로 이어지는 다리가 보였다. 100년 전 한 겨울이면 호수가 깡깡 얼었고 아이들은 팽이를 치고 썰매를 탔을 것이다. 현재 청초호엔 요트 체험장이 들어섰다. 대부분의 배들이 정박해있는 한가한 호수엔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

그는 수필 ‘인생을 눈 뜨게 한 영원한 사랑’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일이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굶는 일이고 가장 슬픈 일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괴로움은 자기의 건강을 잃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를 맛보지 않았다면 그는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굶은 일은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고 앓은 것도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것은 그 슬픔을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는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7년 전에 아들을 잃었다. 1974년 2월 이화여대 졸업을 앞둔 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쓴 시가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밤하늘의 별빛만/네 눈빛처럼 박혀 있구나…다 잠든 밤/ 내 홀로 네 창 앞에 서서/네 이름을 불러 본다/애리야! 애리야! 애리야!하고…” 아내마저 76년 이른 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긴 시간을 홀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딸과 아내의 죽음은 인생의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슬픔을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가버린 두 사람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적이 없다. 오직 사랑의 대상이 있을 뿐이다. 먼저 간 두 사람이 내게 준 것은 결코 슬픔만은 아니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유산으로 준 것이다.”(수필 ‘인생을 눈뜨게 한 영원한 사랑’ 중에서)

일상적 서정과 실존적 허무

역설이다. 그는 아픔을 통해 실존적 허무의식을 극복했다. 그래서 아픈 것에서 아름다운 시가 나올 수 있나보다. 세상은 급격히 변했지만 황금찬 시인의 작품을 관류하는 주제는 여전히 사랑이다. 그는 ‘시의 바탕은 서정이고, 시인은 그 서정의 터 위에 집을 짓는 하늘의 예술가’라고 믿었다.

“내 몸의 중량이/바위일까 돌일까/돌의 무게가 될 수 없다/바위는 더욱 아니고/풀잎일까 낙엽일까/내 말의 중량이/풀잎이나 나뭇잎 만큼만 된다면/여름이 있으련만/낙엽보다도 가벼운 내가/지금 걸어가고 있다.”(‘흔적’ 중에서)

‘내 몸의 중량이 바위일까 돌일까’라고 존재의 중량을 재보는 시인은 돌의 무게가 될 수 없다. 바위는 더욱 아니라는 인식에 이른다. 풀잎이나 나뭇잎보다도 가볍고 낙엽보다도 가벼운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낮아진 자세로 신에게 엎드리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자기 인식 과정이다.

그는 전쟁 중에도 시를 썼다. 6·25 한국전쟁 때 종군작가였다.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썼다. 그가 시를 쓰면 붓글씨를 쓰는 정훈병이 크게 옮겨 적어 담벼락이나 대문 같은 곳에 붙였다. 그 시를 지나가는 군인이나 피란 가던 민간인들이 보고 울었다.

그는 ‘예술가의 삶’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 번을 죽었다 태어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노동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노동과 시 쓰는 일 외에 그래도 있다면 아마도 남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남들만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시만을 써서 살 수 없으니까 노동 대신 택한 것이 교사의 일이었다. 시만을 써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 버리고 시만을 썼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에 만 33년 있었고 대학에서 20년 이상 있었다. 그렇지만 직업인으로 직장을 삼지 않고 시인으로 직장을 삼았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도 시업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현역 문인 중 최고령인 시인은 함북 성진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열네 살 때 ‘아이생활’이란 청소년 잡지를 보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53년 ‘문예’지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39권의 시집, 문장론과 22권의 수필집을 냈다. 54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한 후 돈화문로 초동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다. 현재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둘째아들 도정씨와 지낸다.

영원한 ‘해변시인학교 교장’

시인의 고향 속초는 푸른 바다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해방 후 함북 성진에서 강원도로 내려온 그는 46년부터 9년간 강릉에 살았다. 그는 ‘동해안 시인’으로 불린다.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길러낸 문인들이 많았고, 52년 시동인지 ‘청포도’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강원도 문학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인이 꼽는 대표 시 중 하나가 ‘별과 고기’이다.

“밤에 눈을 뜬다/그리고 호수 위에/내려앉는다/물고기들이/입을 열고/별을 주워먹는다…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 먹지만/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먼 하늘에 떠 있다.”(‘별과 고기’ 중에서)

‘별과 고기’ 시비가 세워진 강원군 양양군 낙산도립공원 해변엔 겨울바다를 보러 온 여행자들이 간간이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감투를 사양했던 그가 유일하게 받은 것이 박목월 시인의 유지로 세워진 ‘해변시인학교 교장’ 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해변시인학교 교장을 지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꽃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에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기자가 모래사장에 무심코 쓴 ‘별과 고기’란 글씨도 파도에 지워졌다.

그의 100년의 삶은 시였다. 그가 남긴 8000여편의 시는 그의 삶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키는 시와 시인이 있는 한 이 세상엔 언제나 꽃이 피고 있을 것이란 시인의 목소리가 하늘에 걸리는 듯했다.

황금찬처럼 생각하기

황금찬 시인은 '시는 신을 기억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황금찬의 신앙 시편들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예수의 정신이 어떻게 현실에 구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시선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과 신의 섭리를 보기 위해서 영혼의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영혼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니/ 바위도 눈을 뜨고/ 살아서 흐르고 있는 강물이며/ 저 숲 속을 빠져가는 바람은/ 모두 나의 호흡이다/ 낮에 눈을 뜨는 것은/ 영혼이 아니다/ 영혼은 모든 것들이 눈감을 때/ 비로소 눈을 뜨나니/ 언제나 푸른 별들과/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영혼은 잠들지 않고' 전문)

그는 시선집 '영혼은 잠들지 않고' 서문에서 시는 기도 다음에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의 시는 기도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다 잠든 때 홀로 깨어 드리는 기도처럼 그렇게 쓰는 것이다. 나라를 근심하고 세계를 위하고 가족과 이웃을 위하고 또 나를 돌아보는 마음자리 기도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시는 그 기도 다음에 오는 것이다."

시인에게 시인 아들이 있었다. 손을 잡고 다정하게 바닷가를 걸었던 아들 황도제 시인의 시에 아버지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산이라면 나 또한 산이고/ 아버지가 구름이라면 나 또한 구름이다…아버지는 한 사람의 시인이 생겨나면 열 사람의 강도가 없어진다고 말씀하신다/ 나 또한 한 사람의 시인이 생겨나면 열 사람의 강도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아버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말씀이 옳기에 따라하는 것이다."(황도제의 시 '나는 누구인가'중에서) 그는 아들을 2009년 앞서 보냈다.

속초=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