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방탕에서 회심… 오직 기도로 하나님 살아계심과 능력을 증거

조지 뮬러
 
영국 애쉴리다운 조지 뮬러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뮬러의 성경. 자신이 묵상한 내용을 메모했다.
 
박물관에는 뮬러가 생전에 쓰던 물건들이 전시돼있다.
 
브리스톨 아르노 베일 묘지의 조지 뮬러 무덤 묘비석.
 
고성삼 목사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성기를 누렸고, 영국의 기독교도 동일한 영광을 누렸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여러 인물들(찰스 스펄전,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등)이 많지만 이 지면에서는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사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국 성도들에게 뮬러는 '5만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전설적 신앙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삶과 사역은 많은 부분 가려져 있다.

방탕한 시절의 뮬러

조지 뮬러(1805∼1892)의 삶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예증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이야기들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뮬러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 거의 150만 파운드를 받았다. 오늘날 시세로 따지면 1300억원이 족히 넘는 금액이다. 이 같은 기적이 아주 옛날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일어났으며 분명한 증거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지 뮬러는 1805년 9월 27일, 지금은 독일로 편입된 프러시아의 작은 마을인 크로펜슈테트에서 태어났다. 세관원의 아들이던 그는 스무 살까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의 부친은 그저 은퇴 후 아들의 목사관에서 살고 싶은 목적에 아들이 성직자가 되길 원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조지 뮬러는 16세 때부터 습관적 도벽과 만성적 거짓말, 음주에 빠졌고 사기죄로 5주 동안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다. 1825년 그가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까지 본인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짓지 않은 죄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임종하는 순간에도 그는 술에 취한 채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회심과 신앙훈련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니던 독일 할레대학에서 우연히 한 기도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모임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꿔 놓았다. 그는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고 프린트물 설교를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 전환은 참석자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때 일어났다. 뮬러는 무릎을 꿇어본 적도,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모임 전체는 영적 분위기로 가득했고 그는 거기서 거듭났다.

뮬러는 회심한 지 두 달 만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은 그의 아버지를 매우 분노하게 했다. 그래서 재정적 지원이 끊어지게 됐으나 이를 계기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그는 모든 재정 필요를 하나님께 맡겼다.

1829년 24세였던 조지 뮬러는 유대인 선교를 위해 런던으로 오게 된다. 그런데 선교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심각한 병을 앓았고 거의 죽을 뻔 했다. 뮬러의 인생에 또 다른 방향 전환이 일어난 것은 병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다. 선교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뮬러는 작은 교회에서 연봉 50파운드의 사례금과 함께 목사직을 제안 받았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느끼면서 사례금 받기를 사양했다. 그 순간부터 1898년 그가 별세할 때까지 뮬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신뢰했다.

브리스톨 사역의 기적

뮬러의 다음 목회지는 브리스톨에 있는 베데스다교회였다. 한때 사람들로 넘쳤던 교회는 쇠퇴해 6명이 모일 정도로 작아졌다. 뮬러는 하나님께 맡기고 열정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성도들은 늘어났고 재정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교회는 물질적 영적으로 회복이 됐다.

뮬러는 1834년 브리스톨에서 교회 사역 중 성경지식협회를 설립했다. 교육의 혜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자는 목적이었다. 특히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뮬러는 협회를 통해 교회 안에 교회학교를 견고히 세워 누구나 성경을 배우도록 도왔고, 영국 전역에 성경을 배포하는 일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일도 수행했다.

당시 브리스톨 인근에서는 유행성 콜레라로 고아들이 급속히 늘었다. 뮬러는 즉각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835년부터 고아원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거대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마침 하나님은 이 사업을 시작하기 나흘 전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으로 확신을 주셨다.

전설이 된 고아원 사역

조지 뮬러는 고아원 사역을 시작하며 하나님께 1000파운드와 도울 사람들을 구했다. 다섯 달만에 재정과 인력은 공급됐다. 30명의 소녀들을 자신의 집에 수용하며 고아원을 시작해 나중엔 130명 어린이를 위한 세 개의 건물을 건립했다. 1845년에는 원생들이 300명으로 늘었는데 이들을 위해 1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금액이 필요했다. 뮬러는 다시 기도했고 1849년 애쉴리다운이란 곳에 300명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고아원의 문을 열 수 있었다.

1870년까지 애쉴리다운에는 10만 파운드 넘는 다섯 개 건물이 추가로 건축됐고 2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났다. 모든 재정은 일체의 부채 없이 해결됐고 사역자들은 광고나 요청 없이 오직 기도의 결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고아원에 머물렀다. 일자리를 찾아 고아원을 떠나면 조지 뮬러는 축복기도를 해 주었고 성경을 선물했다.

한 고아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 소지품은 성경과 옷들과 반 크라운의 돈이었다. 그리고 그 중 최고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조지 뮬러의 축복 기도였다.’ 또 다른 아이는 ‘내게 일어난 가장 위대한 일은 뮬러의 고아원에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했다.

5만번 응답 기도보다 중요한 것

1875년 70세이던 조지 뮬러는 고아원 사역을 이양했다. 이후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에 헌신한다. 뮬러는 하나님에 대해 그가 발견한 진리를 많은 청중들에게 전하기를 원했다. 이후 17년의 선교여행 동안 미국 네 번, 인도 두 번, 호주 세 번,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42개국을 순회하며 설교했다.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20만 마일(32만㎞)을 다녔다. 그는 1892년 88세에 여행을 마무리 했다.

우리는 뮬러의 삶 속에서 5만번 이상의 기도 응답으로 모인 1000억원에 매료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했는가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고아들을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 열정은 세계적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과연 성경적인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와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기도했다면 조지 뮬러의 기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글·사진 고성삼 목사 (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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