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보석까지 팔아가며 63개 예배당 설립… 복음 위해 다 바쳐

헌팅던 백작부인이 1765년 런던 배스에 건축한 교회로 지금은 기념교회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교회 내부와 입구의 기둥 모습. 헌팅던 백작부인은 18세기 당시 이같은 교회당을 63개나 세워 복음적 설교가 더 많이 전파되기를 원했다.
 
셀리나 헌팅던 백작 부인
 
고성삼 목사


18세기 영국의 영적 대각성은 조지 윗필드와 웨슬리 형제의 공헌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일을 가능케 하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다. 셀리나 헌팅던 백작부인(Selina Countess of Huntingdon·1707∼1791)은 윗필드와 웨슬리 형제의 든든한 후원자였을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명예를 바친 여인이었다.

셀리나는 1707년 부자였던 페레르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고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생사(生死)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아홉 살 때 마을에서 한 아이의 장례 행렬을 본 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소일거리인 도박이나 험담, 연애행각 등을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열망을 불태웠다.

셀리나는 스물 한 살 때, 11세 연상의 데오필로스 헤스팅스 헌팅던 백작과 결혼했다. 남편은 훨씬 더 부유하고 유력한 인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결혼 후 하나님 사역의 동지로 승화됐다. 남편은 자선사업가가 돼 음식바구니를 들고 성경 말씀을 나눠주면서 가난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돌봐주려는 아내의 꿈을 지지했다.

복음전도의 열성

셀리나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는 시누이 마가렛 헤스팅스였다. 마가렛은 윗필드와 웨슬리의 친구로, 당시 모라비아파 신앙에 영향을 받은 벤자민 잉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마가렛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과 가족이 이 복된 소식을 듣기를 갈망했다. 특히 셀리나의 뇌리에 꽂힌 마가렛의 말이 있었다. “내가 생명과 구원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은 후, 나는 천사와 같이 행복해졌어요.” 이 고백은 셀리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병고에 시달릴 때, 다시 기억났고 위로가 됐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셀리나는 마가렛처럼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누기 시작했고, 웨슬리를 초대해 설교를 들었다. 셀리나는 귀족사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셀리나는 부유한 친구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려 했다. 윗필드와 같은 설교가들이 오면 집안에서 일하는 시종들을 위해서도 전도집회를 열었을 정도로 전 생애를 통해 부유한 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도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전임 사역자처럼 뛰다

셀리나는 회심 후 10년간 남편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내요 어머니 그리고 사교계의 안주인이라는 당시의 인습적 역할 때문에 직접 사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두 명의 자녀가 천연두로 죽고 남편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셀리나는 슬픔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본격 사역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첫 감리교 콘퍼런스를 주관했고 웨일즈의 복음 증거자였던 하웰 해리스와 함께 마을 전도를 시작했다.

그의 집은 웨슬리 형제나 윗필드같이 지친 순회설교가들의 안식처가 됐다. 윗필드는 “애쉬비(Ashby)는 벧엘과도 같다. 우리는 매일 아침 성찬예식을 가졌고 하루 종일 천상의 대화를 나눴고 밤에는 설교했다”며 백작부인의 시골집들 중 하나였던 애쉬비에서의 시간을 기록했다.

1748년 그는 윗필드를 자신의 전속목사로 임명했다. 목사직을 사사롭게 이용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영국 국교회 강단 밖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셀리나는 당시 복음주의권 설교자들이 영국 국교회로부터 인정받기 어려워지자 더 많은 전속목사를 임명했다.

복음적 설교가들이 영국 국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로 하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셀리나는 사망 무렵까지 63개의 예배당을 세웠고 건축비를 지원했다. 브라이튼의 예배당 건축을 위해 37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4억원)의 값진 보석을 팔았다는 기록도 있다.

교단 설립까지

영국 국교회에서 윗필드와 웨슬리가 일으킨 복음주의 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자, 헌팅던 백작부인은 신실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대학 설립을 결단하게 된다. 1767년 웨일즈에 트레베카대학을 세웠는데 모든 비용을 혼자 감당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학생들에게 숙소와 음식, 옷, 말, 가운, 사제복, 소정의 용돈까지 지급했고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도 계속 관심을 보여줬다. 셀리나는 설교자들의 전도집회와 다른 사역을 위한 구체적 계획뿐 아니라, 그들의 옷가지와 건강을 격려하기 위해 장문의 개인적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백작부인은 개척한 교회마다 전속목사들을 임명했다. 그 일로 각 지역 국교회 목사들이 반발, 급기야 소송까지 벌어지게 된다. 재판에서는 오직 국교회 교구 목사들만 교구에서 설교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이는 백작부인이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동기로 작용한다.

1783년 헌팅던 백작부인은 ‘커넥션(Connexion·복음주의 운동에 입각한 새로운 교단. 현재에도 50여개의 교회가 남아 있음)’을 탄생시켰다. 그가 세운 트레베카대(지금은 케임브리지대로 편입)에서 배출한 사역자들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 원주민과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았다.

장례비용도 바치다

헌팅던 백작부인은 84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나의 일을 마쳤다. 아버지께 가는 것 외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위대한 가문의 귀족부인이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말년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과 동등하게, 그저 용서받은 또 한 명의 죄인으로 여겼다. 백작부인은 자신의 장례식 비용으로 남겨 놓았던 마지막 300파운드조차 버밍햄의 교회 개척을 위해 헌금했다.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고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 드렸다.

하나님은 헌팅던 백작부인처럼 복음을 위해 쓰임받는 신자들을 지금도 남겨 두셨다. 필자는 유럽 재복음화를 위해 1000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21세기의 셀리나’를 통해 유럽의 무너진 교회들을 다시 세우시고 있다. 사역 초기부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일에 빛도 이름도 없이 기도와 물질로 동역한 성도들이 많다. 무너진 유럽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신한 셀리나들을 더 많이 보내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글·사진 고성삼 목사 (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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