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내가 거름이 돼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빌뱅이 언덕의 권정생 작가의 토담집으로 가는 산책로. 동화 '강아지똥'의 배경이 된 돌담길이다.
 
'권정생 동화 나라' 앞에 세워진 '몽실 언니' 모형.
 
권정생이 16년 동안 살았던 일직교회 문간방 자리에 세워진 교회 별관 벽의 강아지똥 그림 (위)과 일직교회 예배당과 종탑.



 
빌뱅이 언덕에 지어진 권정생 작가의 토담집 전경. 권 작가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을 좋아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평생 낮은 자리에서 소박하게 살며,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애정과 굴곡진 삶을 사는 이웃의 이야기를 가슴 뭉클하게 그려낸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은 ‘성자가 된 종지기’로 불린다.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고, 20대 전후로 얻은 폐결핵과 늑막염 등의 질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생명의 숭고함을 알리는 아름다운 동화를 썼다. 그는 나눔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졌다. 90여편의 작품에서 들어오는 연 인세 1억원과 10억원의 자산이 있었지만 비료부대로 부채를 만들어 쓰고 “생활비로 월 5만원이면 좀 빠듯하고 10만원이면 너무 많다”는 고민을 하며 살았다. 자산은 그의 유언에 따라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 경북 안동시 조탑리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그가 24년 동안 살았던 경북 안동시 조탑리 7번지 작은 토담집으로 가는 돌담길엔 이제 막 시작된 겨울 햇살이 걸쳐 있었다. 대표작인 단편 동화 ‘강아지똥’의 배경이 된 장소다. 어디선가 돌이네 흰둥이가 달려 나올 듯했다.

작가는 비 오는 어느 날 산책길에서 강아지똥이 잘게 부서진 자리에 민들레꽃이 핀 것을 봤다. 사람들은 민들레꽃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그는 강아지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아지똥을 쓴 게 1968년 가을부터 1969년 봄까지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꽃, 해님, 별같이 눈에 잘 보이는 것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꾼 거죠.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을 찾아 그것들을 이야기로 썼던 겁니다.”(‘먹구렁이 기차’ 서문 중에서) 그는 ‘하나님은 세상에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동화를 썼다.

마른 나뭇가지가 드리워진 겨울의 돌담길 한구석에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조그맣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똥을 눴다. 강아지똥이다. 날아가던 참새가 “에구 더러워” 하며 지나간다. 소달구지에서 떨어진 흙덩이조차 “너는 똥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개똥”이라고 놀리자, 강아지똥은 서러워 울어버린다. 미안해진 흙덩이가 강아지똥을 위로한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

봄이 오자 강아지똥 옆에 조그맣게 민들레 싹이 텄다. 민들레는 자신이 꽃을 피우려면 비와 햇빛 외에 강아지똥 도움이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너의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해. 예쁜 꽃을 피게 하는 것은 바로 네가 하는 거야.” 강아지 똥은 벅차오르는 기쁨에 그만 민들레 싹을 꼬옥 껴안으며 “내가 거름이 돼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라고 말한다. 사흘 동안 긴 비가 내리고 강아지똥은 잘디잘게 부서져 활짝 핀 민들레꽃의 고운 향기가 된다. ‘강아지똥’의 줄거리다.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그가 68년부터 16년간 교회 종지기로 살았던 일직교회 마당엔 종탑이 세워져 있다. 종탑엔 ‘종 치셔도 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긴 종 줄을 힘껏 잡아당기니 묵직하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마을에 퍼졌다. 한 사람의 생애와 삶의 흔적들이 조각보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권정생은 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노무자의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보릿고개가 고통스러웠던 46년 봄, 그는 외가가 있던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먹을 것이 없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작가의 삶은 동화 ‘몽실 언니’에 그대로 투영됐다.

떠돌이 생활을 접고 68년부터 경북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았다. 겨울이면 종 줄에 성에가 끼고 꼬장꼬장 얼어 손이 시렸지만 맨손으로 종을 쳤다. “새벽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나요”그가 맨손으로 종을 치는 이유였다.

“불치병을 가진 아랫마을 아이의 건강을, 이 새벽에도 혼자 외롭게 주무시는 핏골산 밑 할머니의 앞날을, 통일이 와야만 할아버지를 뵐 수 있다는 윗마을 승국이 형제의 소원을, 어서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이 와서 전쟁이 없어지고, 주림이 없어지고, 슬픔과 괴로움이 없어지고.”(산문 ‘새벽종을 치면서’ 중에서 )

당시 일직교회 예배당과 종탑, 그리고 권정생 문학의 산실이었던 문간방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 종탑도 그가 작고한 후 종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다시 세운 것이다. 그가 종지기를 그만둔 것은 83년 교회에 차임벨이 보급되면서였다. 그 무렵 그는 교회 문간방에서 집필한 작품의 인세 60만원으로 교회 청년들과 함께 빌배산 빌뱅이 언덕에 흙집을 지었다. 그가 흙집 지을 장소를 고르면서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이 교회가 보이는 곳이었다. 얼마나 주일학교 아이들을 사랑했는지, 아이들이 저 멀리 교회에서 빌뱅이 흙집을 향해 “선생님!” 하고 부를까봐 화장실조차 교회가 보이는 방향으로 두었다.

세상의 언니, 몽실 언니

권정생의 삶은 고스란히 문학이 됐다. 교회문간방에 살면서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새벽종을 치면서’를 썼다.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병든 아들을 간호하고 집을 건사하느라 고생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무명 저고리와 엄마’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을 썼다. 그는 생의 아름다움과 공존의 이유를 자연과 생명, 어린이, 가난한 이웃 등의 입을 빌려 담담히 이야기한다.

‘몽실 언니’ 속에서 주인공 몽실은 살강마을(안동시 임하면)에 살다가 단지 밥을 얻어먹기 위해 남편을 바꾸는 어머니를 따라서 댓골마을(안동시 화목리)로 간다. 몽실에겐 살강마을이나 댓골마을이나 다 똑같다. 친아버지와 새아버지도 똑같이 불쌍했다.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어머니를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그만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만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몽실 언니’ 작가의 말 중에서) ‘몽실 언니’는 삶의 고난을 끌어안는 세상의 언니였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상으로 다가온다.

토담집 댓돌 위에 누군가 갖다 놓은 꽃다발이 있었다. 그가 앉았던 툇마루에 앉아서 찬찬히 풍경을 바라봤다. 붉은 산수유열매, 개나리 덤불 밑에 우두커니 자리 잡은 뺑덕이(강아지이름)의 집, 빨래가 없는 빨랫줄, 마당에 핀 이름모를 풀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오소리네 집 꽃밭’이라는 동화를 썼다. 빌뱅이 언덕 뒷산에는 오소리네 집 꽃밭처럼 사람의 손 하나 댈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다. 그는 평생 문우인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에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 참 좋은 집”이라고 썼다.

그의 삶의 땀이 밴 유품은 일직교회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권정생 동화나라’(안동시 일직면 성남길 119)에서 만날 수 있다.

[권정생 처럼 생각하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그래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됐다. 내가 다섯 살 때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도 조금씩 알게 됐다. 거듭나는 과정은 아마 이렇게 서서히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빌뱅이 언덕' 중에서)

권정생(사진)이 거지로 떠돌 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은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빈 깡통에 밥을 나눠주는 마음을 가졌다.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에서 그가 느낀 것은 예수의 사랑이었다. 그제야 그는 다섯 살 때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와 십자가 의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1966년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고 의사로부터 2년이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강아지똥'을 쓰며 그 기한을 넘겼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강아지똥이 거름이 돼 민들레꽃을 피우는 이야기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위안이 됐다. "내가 거름이 돼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라는 강아지똥의 말은 바로 작가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그는 훗날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안동=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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