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스피커 없던 시절 4만명 놓고 복음전도… 1만8000번 넘게 설교

19세기 영국 화가 에어 크로우가 그린 ‘무어필드에서 설교하는 조지 윗필드’(위쪽).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리포트 올드사우스장로교회 지하묘실에 있는 조지 윗필드의 무덤. 무덤 옆에는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이 기록돼있다. “나는 나의 성격이 밝히 드러나는 심판날까지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죽은 후엔 다음과 같은 묘비명 이외에는 원치 않습니다. ‘여기 조지 윗필드가 누워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날 발견될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18세기 영국교회 부흥을 이끈 조지 윗필드.
 
고성삼 목사


18세기 들어서면서 영국교회는 마침내 부흥을 경험한다.

현대 영국의 대표적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이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셔서 교회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이 있었던 곳에서만 부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존스가 부흥을 말할 때는 로마가톨릭 교회, 영국 성공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복음주의 운동을 펼쳐나갔던 시절이었다.

이들 교회들이 어느 정도 부흥을 경험했을지 몰라도 존스 목사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부흥은 두 교회 역사상 없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로이드 존스는 장 칼뱅과 그의 후예들인 청교도들이 주도한 개혁운동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가 판가름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부흥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적 설교가로 주목

이렇듯 중요한 부흥을 일으킨 사람들 중 기억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1714∼1770)일 것이다. 윗필드는 옥스퍼드 재학 시절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와 함께 ‘홀리 클럽’ 회원이었다. 그는 혹독한 금욕적 신앙생활을 하던 중 1735년 신앙체험을 통해 중생의 자유와 내적 회심, 은혜의 복음을 경험했다. 그는 이 시기를 회상하며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도록, 무거운 짐을 제하여 버리기를 기뻐하셨다”라고 썼다.

1736년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 성공회에서 안수를 받고 설교를 시작했다. 첫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영국교회들은 그의 노골적 복음 중심 메시지 때문에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윗필드는 굴하지 않았다. 예배당 대신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대중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영국 전역을 다니며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미국도 7차례나 방문해, 조너선 에드워즈와 함께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다. 스코틀랜드는 14차례 방문해 그곳에서도 부흥을 일으켰으며, 웨일즈의 대표적 단체인 ‘웨일즈 칼뱅주의 감리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의 초대회장을 맡아 부흥을 견인했다. 그는 생애 통산 1만8000번 이상 설교했고, 상당한 열매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복음전도에 매진한 칼뱅주의자

현대 전기 작가인 해리 스토우트는 윗필드가 신학에 흥미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다. 실로 윗필드는 동시대인들에게 그저 복음주의자만이 아니라 ‘뛰어난 체계적 신학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무오성에서 시작됐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말씀의 무오한 원칙을 믿었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칼뱅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1740년 존 웨슬리에게 보낸 개인적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칼뱅이 기록한 어떤 것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교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서 얻은 것들이며 하나님에게 배웠습니다.” 1742년 또 다른 친구에게는 “나는 칼뱅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내게 가르쳐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칼뱅주의적 생각을 포용한다네”라고 편지를 썼다.

칼뱅주의 교리에서 예정론은 복음전도의 에너지를 약화시킨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윗필드의 삶을 읽고 공부하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브리스톨에서 노동자 계급에게, 조지아에서 고아와 노예들에게, 헌팅턴 부인의 집에서는 귀족들에게, 런던 케닝턴공원에서는 시끌벅적한 무리들에게 설교했으며 4만명 앞에서도 설교했다.

마이크도 없던 시대에 그 숫자는 믿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야유를 보내거나 돌을 던지는 사람이 아닌, 설교를 들으려고 온 군중은 조용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일종의 ‘거룩한 고요’가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1.6㎞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영국의 연극 배우 데이비드 가릭은 윗필드처럼 “오!”라는 탄식과 감탄이 반응으로 나오는 연기를 위해 금화 100기니를 지불하려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윗필드는 설교 도중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발을 굴렀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언급할 때는 심판자를 연상하는 검은 모자를 썼다. 그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재능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설교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회심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갈망으로 열정적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윗필드의 조부 앤드류 윗필드는 브리스톨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 역시 사업가였기에 윗필드는 사업을 물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안정된 생활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미국 조지아로 떠났다. 그곳은 영국의 빈곤층과 범죄자 집단을 데려다가 정착시킨 식민지였다. 그곳에서 안수 받은 후, 6주 후에 “이제 세상이 나의 교구이다”라고 선포했다(이 말은 한 달 후 웨슬리가 사용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 후 윗필드는 런던 동부 무어필드의 태버너클교회, 웨스트엔드의 토튼햄코트 로드에 예배당을, 브리스톨의 또 다른 태버너클교회 등 세 교회를 개척했고, 미국 조지아의 고아원과 킹스우드 학교도 세웠다. 그는 선조들이 일으킨 사업을 이어 받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복음을 위한 사업가였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시간을 초월한 신앙의 모범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한 나라를 움직이고, 교회를 뒤흔들며 사회의 도덕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같은 사건이 영국에서 발생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분명 대각성운동으로 영국사회가 정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지 윗필드야말로 이 일을 가능케 했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윗필드는 그의 동료이자 그와 쌍벽을 이룬 존 웨슬리와 같이 어떤 조직이나 후계자를 남기지는 못했다. 1770년 윗필드는 미국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여행 중 사망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기 위해 조지 윗필드의 이름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란다”는 그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점점 그를 잊게 됐다. 이는 세례요한의 모토인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쓰임 받은 선대들을 기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거창한 기념관 건립과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하여 오히려 특정 지도자들을 우상시 하는 일이 빈번한 한국교회에는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윗필드의 능력은 그의 재능이나 신학적 지식 혹은 재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에서 나왔다. 그의 기도와 믿음, 하나님 체험과 주의 일을 향한 헌신은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상은 신실한 주의 종, 이름 없이 섬기는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윗필드를 쓰신 하나님이 유럽교회 안에 또 다른 윗필드를 일으키셔 세상으로 파송하시길 소망한다.

글·사진 고성삼 목사 (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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