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신학으로… 참 목회로… 저술로… 청교도를 밝힌 3인

리처드 백스터 목사가 목회했던 키더민스터의 성메리성공회교회와 백스터의 동상.
 
런던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번힐필즈묘지공원 내 존 버니언의 무덤.
 
1678년 출판된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표지. 버니언의 얼굴과 삽화가 실려있다.



 
고성삼 목사


청교도 혁명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했던 찰스 2세가 1660년 국민들의 지지 속에 귀환하자 청교도들에게는 엄청난 박해가 가해졌다. 활발했던 개혁의 기운도 1700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기세가 꺾인다.

하지만 청교도들이 남긴 유산과 그들의 발자취는 지금도 많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영감을 후대에 계속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 청교도들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그 많은 청교도들 중에 몇 명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과 목회, 그리고 저술 활동으로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존 오웬(John Owen·1616∼1683)과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1615∼1691), 존 버니언(John Bunyan·1628∼1688)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건전한 신학의 토대 위에

영국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뱅에 의해 주도된 대륙과 달리 신학적 바탕이 부족한 채 이루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신학자들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이 등장하면서 신학적 토대가 확립됐다. 그는 12세에 옥스퍼드 퀸스칼리지에 입학한 후 하루 4시간만 수면을 취하며 고전 수학 신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이러한 습관은 평생 지속됐는데 이로 인해 노년에는 건강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웬은 21세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당시 찰스 1세가 전권을 부여한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폭정에 항거해 청교도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 토마스 굿윈과 리처드 십스를 통해 신앙적 도움을 받았다. 결정적으로는 26세 때 무명 청교도 설교자의 선포를 통해 뜨거운 회심을 체험한다. 바로 이 경험으로 그는 모든 신학이 머리 속 지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적 신학을 세우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회심 후 그는 영국 성공회의 의식적 예배와 찰스 1세의 폭정, 그리고 아르미니우스 사상이 번져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는 왕을 대신해 국민의 대표가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을 지지했고, 이를 위해 의회 안에 포진해 있었던 청교도들과 함께 청교도 혁명에 앞장섰다. 오웬이 의회에서 히브리서 12장 27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자 이에 감명 받은 올리버 크롬웰은 그를 종군 목사로 임명했다.

이후 옥스퍼드대 부총장에 임명됐고 크롬웰은 그에게 옥스퍼드대를 영국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을 길러내는 요람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호국경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를 노리자 오웬은 그를 비판했다. 이후 크롬웰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크롬웰의 호의를 잃었다. 무엇보다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펼쳐진 청교도 핍박 정책으로 그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662년 청교도 목회자들이 교회로부터 추방되자 그는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개척해 계속 예배를 드렸다. 이 때문에 피소되기도 했으며 설교 금지령까지 받았다. 결국 사망하던 해인 1683년 그가 저술한 모든 책이 옥스퍼드대에서 불태워졌고, 잦은 병으로 고생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오웬은 청교도를 대표하는 설교자요 신학자였다. 왕정복고 이후 23년간 비국교도 운동을 이끌며 영국의 복음주의를 지켜낸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80여권의 책을 남겼다. 매우 방대하고 깊이 있는 저술이지만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교도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예외 없이 그의 책들을 거쳐야 한다.

참 목회자상 제시

존 오웬을 통해 신학적 기반이 튼튼해 졌다면 리처드 백스터 목사는 진정한 목회자상을 보여줬다. 백스터는 1641년부터 키더민스터의 교구 목사가 된다. 처음엔 주민들의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유는 설교 내용이 너무 강해서였다. 그는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요청했다. 성찬식 참여 기준도 엄격했다. 하지만 17년간 사역을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뒀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듯 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했다. 정규 설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성도들의 가정을 수시로 심방했다. 그는 가정교사처럼 상세하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담당 교구의 모든 성도들을 1년에 한 번 이상 심방했고, 심방할 때마다 한 시간 넘게 머물며 가정의 영적 상태를 돌봤다. 일주일에 평균 15가정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수많은 가정에서 시편 찬양을 부르며 가족예배를 드리게 됐고, 주일에는 백스터 목사의 설교 내용을 가족들이 나눴다.

하지만 그 역시 1662년 영국 국교회에서 추방 당해 정든 사역지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의 모든 책이 압수당했고 수 차례 투옥되는 등 고난을 겪었다. 1689년 관용령이 시행된 후 설교와 저술활동에만 전념했고 2년 뒤인 169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역사를 바꾼 땜장이

청교도들이 남긴 중요한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술일 것이다. 특히 청교도 문학을 이야기할 때는 존 버니언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남긴 ‘천로역정’은 유럽인들의 서재에 한 권씩은 꽂혀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성격이 거친 땜장이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부전자전이었다. 태도가 늘 불량했으며 폭력적이었다. 스스로 ‘지옥이 있다면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버니언도 땜장이로 일했다. 그는 등에 30㎏ 가까운 도구상자를 짊어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곤 했다. 그때의 경험은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순례자가 등에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고생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젊은 날의 많은 죄 때문에 죄책감으로 눌려 있던 그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약 2:13)”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모든 죄짐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벗겨졌음을 확신하고 중생을 체험한다. 이후 ‘내 몸속에 만약 1000갤론의 피가 있다면 나는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주를 위해 쓰겠다’고 자서전에 밝혔고 자신이 말한 그대로 살아갔다.

당시 찰스 2세는 성공회 목회자 이외의 목사들에게서 설교권을 박탈했다. 버니언은 그럼에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했고 이로 인해 12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수감 생활 동안 주옥 같은 책들을 쓰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천로역정’이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성경을 사랑하며 열심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훌륭한 문학가가 됐다.

오랜 옥살이를 마치고 난 후에야 설교 자격을 얻은 그는 많은 곳을 다니며 말씀을 증거했다. 버니언의 설교는 깊이 있고 영감이 넘쳤다. 그 설교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던지 찰스 2세가 존 오웬을 만나 버니언과 그의 설교에 대해 험담을 하자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폐하, 감히 여쭙건대 제가 이 땜장이만큼만 설교할 능력이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학식을 기꺼이 버리겠사옵나이다.”

글·사진=고성삼 목사(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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