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오직 성경' 바탕 개혁을 주창하던 청교도와 왕권 정면충돌

영국 청교도 신학자 100여명이 1643∼1649년 개혁 교회 문서를 작성했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여기서 도출된 신앙선언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육서인 '요리문답' 표지.
 
청교도혁명 이후 호국경으로 임명된 올리버 크롬웰.
 
고성삼 목사


한국교회 안에는 종교개혁자 칼뱅을 추종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영국의 청교도들을 본받기 원하는 신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청교도(Puritan)라는 말은 원래 '까탈스럽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유별난 부류'라는 비꼬는 의미로 사용됐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완전한 종교개혁이 이뤄지길 소망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왕이나 국교도들과 갈등을 빚었다.

까탈스러운 사람들

청교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존 밀턴은 ‘종교개혁을 개혁하는 이들’이라고 정의 내렸다. 어쩌면 이 말이 가장 어울리는 호칭인 것 같다. 존 낙스가 제네바에서 칼뱅의 종교 개혁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완벽한 모델을 경험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 영국 내에서도 가톨릭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그러니까 온전히 성경에만 근거한 개혁을 완성하고자 하는 개혁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실 헨리 8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추진한 종교개혁은 어중간했다. 일례로 성공회 목사들은 여전히 사제로 불리는 것을 좋아해 사제복을 벗지 않았다. 성찬식이 진행될 때에도 가톨릭처럼 무릎을 꿇고 떡과 포도주를 받는 관습을 지속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이 종교개혁을 천명했지만 본인은 ‘새로운 신앙 방식’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과거의 의식들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모든 구습들은 개혁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여왕과 성공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급기야 엘리자베스 여왕 마지막 통치 10년 동안 청교도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손 없이 죽자 그녀의 조카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가 후계자로 세워졌다.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의 장로교 신학과 정치 제도 아래 성장한 제임스 1세에게 큰 희망을 걸었다. 제임스 1세는 이에 부응하듯 킹제임스성경(KJV)을 번역하기도 했다(1611년). 하지만 제임스 1세 역시 청교도들을 왕권 도전 세력으로 간주해 더 심하게 탄압했다.

그러자 제임스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일부 청교도들은 1607년 네덜란드로 떠났고, 1620년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온전한 청교도 운동을 일으키는 개척자(Pilgrim Father)가 되기도 했다.

제임스 1세가 죽고 나자 그의 말더듬이 아들인 찰스 1세(재위 1625∼1649년)가 왕이 됐다. 갈등의 수위는 더 높아졌다. 찰스는 프랑스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 가톨릭 주교들이 함께 영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등 공공연하게 가톨릭으로 회귀하려고 했다. 더욱이 자신의 야심을 펼치기 위해 캔터베리 대주교에 윌리엄 로드를 앉혔고, 잉글랜드교회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이 시기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청교도의 정치적 득세

영국 전역에서는 찰스 왕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찰스는 반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아일랜드의 가톨릭 군대까지 끌어들였다. 영국 전체가 심각한 내전 상태로 치닫게 되었을 때 탁월한 장군이자 신실한 청교도였던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왕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 내전의 빌미를 제공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와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다. 이른바 청교도 혁명이 성공했으며 영국은 잠시 동안 왕이 아닌 공화국 체제에서 호국경으로 임명된 크롬웰에 의해 다스려졌다.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얻게 되자 영국의 종교개혁은 비로소 시작됐고, 자신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완성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이때 성공회를 대체하고 새로운 교회 체계를 세우기 위해 100여명이 넘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1643∼1649년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모였다. 여기서 도출된 신앙 선언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었고 ‘요리문답’이었다. 칼뱅주의에 입각한 신앙 선언이었다. 이들은 또 ‘성공회 기도서’를 대신할 예배 모범을 만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예배 지침’도 공포했다.

청교도들은 칼뱅의 가르침으로 제네바가 다스려진 것처럼 자신들이 새롭게 만든 신앙고백과 예배 지침을 통해 전 영국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 온 국민에게 엄격한 생활을 요구하는 법률을 만들어 주일성수와 미신 타파 등을 강요했다. 심지어는 성탄절도 성경에는 없는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12월 25일이면 군인들이 시내를 순찰했고 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먹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과거에 성행했던 극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고, 술집과 도박, 닭싸움 등의 오락 등도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다.

청교도의 성공과 실패

청교도들의 새로운 시도는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크롬웰이 1658년 사망하자 군중은 다시 왕을 요구했고, 그 결과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새로운 왕은 민심을 얻기 위해 그동안 금지했던 조치들을 해제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에 의해 공격받았던 모든 것들을 교회 안에 돌려놓았다. 게다가 다시 청교도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펼쳐 모든 성직에서 끌어내렸다. 청교도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청교도는 역사의 무대에서 점차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1700년대가 되면서부터 더 이상 청교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수많은 유산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왜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영국민들에게 배척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청교도 개혁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청교도 내의 분열을 들 수 있다.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청교도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과 다툼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교회파, 퀘이커파, 개간파(Diggers), 평등파(Levellers) 등 여러 파당으로 나뉘어 개혁을 위해 한목소리를 모으지 못한 채 사분오열이 되어 싸우는 동안 국민들은 청교도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언급한 것처럼 정치와 종교의 혼합을 통해 이상을 펼치려는 생각의 위험성이다. 청교도들은 국가를 다스릴 힘으로 법을 제정해 그 힘으로 국민의 신앙과 삶의 개혁을 이루려 했다. 하지만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듯이 법률 조항이 사람들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진정한 개혁은 정치적 권력이나 법률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100여년 후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 등이 일으킨 대각성 운동을 통해 입증된다.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의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넘어 한민족 전체를 위해 쓰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교회는 이제 국민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다. 분열로 점철된 교회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더욱이 세속 권력의 힘을 빌어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는 시도는 반감과 혐오만 키울 뿐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의 교훈을 직시해야 한다.

글·사진=고성삼 목사(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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