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스코틀랜드 역사와 운명 바꾼 ‘하나님의 나팔수’

장로교회의 모교회로 불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전경.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내부에 존 낙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왼쪽). 낙스는 사망할 때까지 이 교회에서 설교사역에 매진했다. 에든버러 시내에 자리한 존 낙스 하우스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존 낙스
 
고성삼 목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완전히 다른 역사와 민족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북쪽에 살던 켈트족이 이주해온 반면, 잉글랜드는 남쪽 대륙에서 건너간 앵글로색슨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대항해 오랫동안 항쟁을 거듭하다가 ‘킹제임스성경’으로 유명한 제임스 왕이 1603년 즉위해 양국 연합체제가 시작됐고, 100여년 뒤인 1706년 잉글랜드에 합병된다.

사선을 넘은 개혁 의지

존 낙스(John Knox, 1513∼1572)는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1540년 사제 서품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 시기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이 시작된 상태였다. 개신교도였던 조지 위샤드의 영향을 받은 낙스는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를 스코틀랜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마 가톨릭 외에는 다른 어떤 교회도 허용치 않는 나라였기에 그는 자신의 소명을 현실 속에서 펼치기 위해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아야만 했다.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세인트 앤드류 성(城)으로 피신했는데 낙스는 그들을 위한 목회자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들을 묵인하지 않고 탄압하고자 프랑스 군대를 끌어들여 개신교도들을 체포했다. 이때 낙스는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노예선에 감금되어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다행히 잉글랜드 서머셋 공작의 중재로 풀려나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하는 잉글랜드의 개혁 작업을 도울 수 있었다.

칼뱅을 만나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죽고 ‘피의 메리’ 여왕이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다시 망명생활을 선택해야 했다. 그 시기 칼뱅과 베자 등은 제네바에서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네바는 신앙의 자유를 원하던 유럽 개신교도들의 집합 장소였다. 낙스는 칼뱅이 개신교 신학을 전파하기 위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 입학, 1554년부터 약 5년간 칼뱅의 지도를 받는다.

이 시기는 낙스에게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다. 그는 칼뱅의 지도를 통해 그의 개혁사상을 터득했을 뿐 아니라 목사 장로 집사를 세우고 장로정치를 실현했다. 제네바 아카데미를 가리켜 ‘사도시대 이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 불렀는데, 가장 성경적인 신앙과 교회 정치형태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낙스는 여기서 종교 자유를 찾아 피난 온 잉글랜드 성도들의 목회자가 되었다. 나중에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가 제네바에 세운 이민자 교회가 잉글랜드 청교도주의를 탄생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1559년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이 죽자 낙스는 망명생활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낙스에겐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귀국한 것이었다. 메리는 잉글랜드의 ‘피의 메리’ 여왕의 사촌으로, 프랑스 왕이었던 남편 프란시스가 죽자 프랑스에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낙스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며 “주님,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메리 여왕의 시도는 줄곧 낙스와 마찰을 일으켰다. 낙스는 목숨이 위험할 것을 알았지만 메리 여왕의 미사를 비난하는 우레와 같은 설교를 선포했고 메리의 미사를 ‘새 이세벨의 우상숭배’라며 비판했다. 낙스의 확신과 용기, 그리고 그의 투쟁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여왕의 편에 섰던 사람이 남긴 편지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나팔수’로 불린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단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외치는 목소리가 500개의 나팔들보다 더욱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던 개혁자

메리 여왕은 거듭된 이혼과 방탕한 생활로 국민들의 불신을 받게 된다. 결국 귀족들은 여왕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고, 군부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 메리는 반란 진압에 실패하면서 체포됐다. 왕위는 겨우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 제임스에게 이양되었다. 메리는 잉글랜드 망명길에 올라 국왕 자리를 노리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다.

제임스 6세의 대관식 설교를 담당했던 목회자는 다름 아닌 낙스였다. 낙스는 어린 요시야 왕에 관한 설교를 통해 개혁운동을 국가적 과제로 선포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운동은 메리 여왕의 복고 시도에도 사멸되지 않고 승리를 얻었다.

낙스는 1559년 5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이후 13년간 교회개혁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다 생을 마쳤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St. Giles’ Cathedral)에서 설교했다. 낙스는 전 생애를 살면서 설교를 ‘주인(주님)의 나팔을 부는 것(blowing the Master’s trumpet)’으로 묘사했다. 그는 실로 당대의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애국자였고 개혁자였다. 낙스의 장례식에서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몰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이 자리에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너무나 많은 날 동안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으나 그는 평화와 영광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특별히 보호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종교개혁

우리는 낙스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고 준비된 한 사람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 낙스 한 명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운명이 바뀌었다. 낙스는 칼뱅의 종교개혁을 연구하며 칼뱅이 제네바에서 운영하던 아카데미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에 매료되었다. 칼뱅은 신학자요 성경 주석가로 알려져 있지만, 위대한 교회 개척운동가이기도 했다. 칼뱅은 낙스처럼 전 유럽에서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온 젊은이들을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훈련시켰고, 이후 유럽 전역으로 신학생을 파송해 21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칼뱅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인쇄술의 발전으로 성경과 신학 서적들을 대량으로 출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유럽에서 칼뱅이 일으켰던 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현재 유럽의 교회들은 힘을 잃어 젊은 세대들이 성경을 제대로 배우기 힘들어졌고, 유럽에 남아있는 신학교들은 대부분 자유주의로 물들었다. 또 너무나 비싼 수업료 때문에 가난한 사역자들이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국 웨일즈의 유니온신학교 마이크 리브스 학장의 시도는 그래도 희망적이다. 리브스 학장은 인터넷을 활용한 온라인 신학교육을 유럽에 확산시키고 있다. 그는 온라인뿐 아니라 지역교회나 선교사들이 멘토가 되어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학습공동체도 세워 유럽에서 제2의 종교개혁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리버풀과 노폭, 헬싱키, 로마, 몬테네그로 등 유럽 각지에서 학습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500여년 전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과거가 아니다. 제2의 종교개혁의 불길이 다시 한 번 유럽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기도해주기 바란다.

글·사진=고성삼 목사(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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