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압제·고난 닥쳐왔으나 이제 생명의 봄 돌아올 날 멀지 않았다”

문학과 지성사의 전영택 중단편선 ‘화수분’ 표지로 박옥수 화백이 그린 ‘나목’.
 
전영택 작가의 손자 전일영씨(오른쪽)와 손부 박옥란씨가 ‘전영택 집 터’ 표석을 가리키고 있다.
 
전영택 작가 초상화. 차남 전상수 화백의 그림.
 
전영택 작가 부부와 육필원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희망’이다. 희망은 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삶이 너무나도 척박하고 가난했던 시절, 진실한 삶의 지평은 꽉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으로 통하는 문만 열려진 것 같았던 절망적인 시대에도 희망을 노래한 사람이 있었다.

늘봄 전영택(1894∼1968)의 대표작 ‘화수분’(1925)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가난한 젊은 부부의 고단한 삶과 동사(凍死)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따스한 휴머니즘의 시선으로 다룬 단편 소설이다. 인간의 원시적 온정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사실적이지만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작가의 죽음관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한국문학사에 뚜렷이 기억되는 휴머니즘의 한 장면으로 꼽힌다.

희망의 문학, 부활신앙 구현

“화수분은 양평서 오정이 거의 되어서 떠나서 해져갈 즈음해서 백리를 거의 다 와서 어떤 높은 고개를 올라섰다.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친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앞을 내려다보다가 소나무 밑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양을 보았다. 그것에 곧 달려가 보았다. 가본 즉 그것은 옥분과 그의 어머니다. 나무 밑 눈 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어린 것 업은 헌 누더기를 쓰고 한끝으로 어린 것을 꼭 안아가지고 웅크리고 떨고 있다. 화수분은 왁 달려들었다. 어멈은 눈은 떴으나 말은 못한다. 화수분도 말을 못한다. 어린 것을 가운데 두고 그냥 껴안고 밤을 지낸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 장사가 지나가다가 그 고개에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깬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린 것만 소에 싣고 갔다.”

작가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구원과 희망이 있음을 제시한다. 아침에 소를 끌고 지나가는 나무 장사에게 구조되는 장면은 구속자(求贖者)의 신앙적 모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화수분’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소설 문학 속에 최초로 구현한 작품이란 의미를 지닌다.

“아직 막 자다 깬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란 문장은 비극적인 결말을 그리면서도 한 줄기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어린 생명을 살려 끝내 사랑과 희망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화수분은 단순히 몰락한 한 가정의 비극만을 그린 작품은 아니다. 당시는 일본의 수탈이 한국 농촌을 피폐화하고 농민들은 농촌을 버리고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매던 시대이다. 작가는 비록 부모 세대는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에 시달리다가 비극적으로 죽어가지만 자녀 세대는 그 비극의 현장에서 ‘출애굽’하길 바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았다. ‘재물이 자꾸 새끼를 쳐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아니한다’는 뜻의 화수분이란 주인공의 이름도 역설적이다.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

목사, 소설가였던 전영택의 작품엔 착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시대상이며 자신의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인공 화수분 또한 그와 닮았다. 그는 일제의 감시 속에 7남매를 키우며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첫 아이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 독립운동에 가담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해 3월 말 귀국했다. 이후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를 받아 쫓기고 있던 채혜수(채애요라·1897∼1978)와 결혼했다. 아내는 창씨개명을 피하기 위해 채애요라라는 영어식 이름을 사용했다. 아내는 결혼식 다음날 일경에게 체포, 1년간 수감됐다.

전영택 역시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연설문, 설교를 일일이 감시당했다. 일제문서(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 1권)에 따르면 그는 1918년부터 사사로운 우편물까지 철저히 감시당하고 통제받는 37명의 한국인 중 한 명이었다.

아내의 독립운동투쟁기를 소설화한 ‘생명의 봄’(1920)을 집필하게 된 심정을 그는 이같이 밝혔다. “나는 마침내 이때에 대하여 3·1 만세운동의 실패와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즐거워해야 할 신혼에 일제에 아내를 빼앗긴 울분한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어서 붓을 들었다.”(이어령·한국문학여구사전) 만세운동은 실패해 죽음과 겨울 같은 압제와 고난이 닥쳐왔으나 이제 생명의 봄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소설 ‘생명의 봄’의 결말이다.

‘독약을 마시는 여인’(1921)은 옥고를 치른 아내가 아기를 출산했으나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자 이를 기억하기 위해 비통한 마음으로 쓴 작품이다. 첫 아이의 죽음은 부부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다. 1943년 그가 작사한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가 통폐합되거나 매각되는 일을 바라보면서 쓴 것이다.

문학관 없이 집 터에는 표석만

아쉽게도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로 종교적 신념을 문학 속에 실천한 전영택의 문학관은 없다. 부부가 말년에 살았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27-15 ‘전영택 집 터’를 최근 찾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연구동 뒷길이다. 좁다란 골목길의 단층 양옥집이었으나 17년 전 허물고 현재는 2층 주택으로 지어졌다. 현재 이곳엔 전영택 작가의 며느리와 손자 부부가 살고 있다. 파란색 철대문집 앞에 ‘전영택 집 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손자 전일영(57)씨는 “할아버지는 조용하고 겸손하신 분이셨다. 늘 성경책을 묵상하시고 글을 쓰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할아버지가 작사하신 찬송가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는 바로 화목한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집은 작고 가난했지만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던 모습이 정겨웠다”고 말했다. 손자며느리 박옥란(56)씨는 “시조부께서 문학과 목회를 두고 갈등할 때 부인 채혜수의 권면으로 문학보다는 목회의 길을 걸으셨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작가는 17세 때 서울 관립의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감리교 학교인 청산학원 중고등학부, 대학부, 신학부를 졸업하고 1923년 귀국했다. 192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아현교회 부목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한국 최초 문예 동인지 ‘창조’ 발간

전영택이 문필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시기는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에 입학한 1918년부터 미국 태평양신학교로 유학 가기 전인 12년 동안이었다. 1919년 김동인 김환 주요한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를 발간했다. 최남선 이광수로 대표돼온 2인 문단시대를 넘어 본격적인 동인문단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아마도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황해도 봉산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던 1933년부터 광복 때까지일 것이다. 광복을 맞을 때까지 절필했던 그의 심정은 시 ‘벽서’에 드러난다. “다시 한 칼이, 내 가슴에/ 원수와의 충신 되란 맹세라니/ 이 맹세 내 붓으로 써 펴내라니/ 아프구나 이 칼이 더 아프구나/ 몇 십 년 아낀 내 붓 들어/ 이 글을 쓰단말인가/ 꺾어라, 꺾어라, 내 혼도 꺾이누나.”

이후 그는 신리교회에서 배일(排日) 설교로 평양감옥에 수감됐다가 출옥한 후에는 설 자리조차 없었다. 대성산 밑에 빈 집을 보금자리로 삼고 자녀 7남매와 풀뿌리로 연명하며 광복을 맞았다. 장녀는 한국 간호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전산초, 장남은 조각가 전상범, 차남은 수채화가 전상수이다.

1964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은퇴한 작가는 이문동 자택에서 원고도 쓰고, 손자들의 재롱도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1968년 1월 16일, 청탁받은 원고를 전달하러 나가다 택시에 치어 숨을 거두고 만다.

늘봄 전영택은 언제나 약하고 눌린 자들에게 애정을 갖고 그 자신의 삶이 그랬듯이 문학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작가였다. 독기 품은 언변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선비형 목회자였다. 자신의 아호처럼 온정이 가득한 늘봄이었다.

[전영택처럼 생각하기]
“암흑 있으면 광명이 있는 것이다”


전영택은 자신의 체험과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작품에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애썼다. 특히 작품에 나타나는 죽음은 그가 평생 일관해 온 기독교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죽음을 통해 참된 사랑과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기에 한 가지 비밀은 언제나 광명을 보는 것이다. 암흑에 부딪혀도 광명을 찾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일에도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이다. 광명이 있으면 암흑이 있고 암흑이 있으면 광명이 있는 것이다. 암흑과 난관이 현실이라면 그 현실 위에 눈이 어두워서 현실 뒤에 혹은 위에 있는 광명과 희망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고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을 보아야 한다. 인간은 영원에 속한 존재이면서 언제나 리(利)의 생활을 하고 영원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전영택의 산문 ‘육의 현실에서 영원의 피난으로’ 중에서, 사상계 1955년)

전영택과 부인 채혜수(채애요라)는 평생의 동지로 살며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다. “채애요라는 문인을 겸한 목사이자 남편인 전영택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둘째 진실한 마음이다. 셋째, 애국정신이다. 넷째, 전영택의 전인적 돌봄목회 철학에 따라 노숙인들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섬김이다. 다섯째, 어린이들을 사랑했다. 여섯째, 평생 가난하게 살았어도 물질과 타협하지 않았다. 채애요라와 전영택은 이처럼 서로에게 선한 여향을 끼치고 서로 사랑하며 믿으며 평생의 삶의 동반자로 실천적 신앙의 삶을 살았다.”(박옥란의 ‘기독교 여성지도자 채애요라의 삶과 신앙에 대한 선교적 연구’ 중에서)

차남 전상수(87) 화백은 “부친은 일제 말기에 요시찰 인물로 감시 당하며 7남매를 키웠지만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말했다. 전영택 작가는 고린도후서 6장 6∼10절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훈으로 남겼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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