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英 종교개혁은 위로부터 시작… 권력·사욕에 따라 격랑

영국 옥스퍼드의 막달렌 스트리트에 설치된 순교탑 모습. 토머스 크랜머, 휴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의 순교를 기념해 세웠다. 이들은 모두 ‘피의 여왕’이라 불렸던 메리에게서 화형을 당했다.
 
크랜머가 화형 당했던 장소.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과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수장령을 선포한 헨리 8세(왼쪽)와 순교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고성삼 목사


왕이 주도한 개혁

영국 종교개혁의 배경과 관련해서는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루터와 칼뱅 등이 이끌었던 대륙의 개혁과는 달리 개인적 욕망을 채우려는 왕과 왕의 명령에 복종한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로부터 시작한다. 형 아더가 죽자 헨리 8세는 당시 유럽의 최강자 스페인의 공주였던 자신의 형수 캐서린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면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형수와의 결혼은 그 당시 교회법에 위반되는 일이었지만 스페인과 영국 왕실의 강력한 로비에 의해 교황의 허가를 얻었다.

이후 안정된 왕위 계승을 위해 헨리 8세는 아들을 원했지만 캐서린에게서는 딸 메리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이후 앤 불린과 사랑에 빠졌고 그는 첫 번째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과 새로운 결혼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자 헨리 8세는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던 종교개혁에 편승해 급기야 1534년 로마 교황과의 단절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영국교회의 머리가 됨으로써(수장령·Act of Supremacy) 독자적 종교개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서 불거진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인 음모가 거듭되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크랜머의 등장

사실 영국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다. 14세기부터 존 위클리프와 그가 길러낸 롤라드파(Lollards·가난한 순회 전도자들)의 영향으로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성경에 입각한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뱅과 같이 확고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탁월한 신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에 의해서 주도되지는 못했다. 헨리 8세는 영국적 종교개혁의 과정을 책임질 사람으로 토머스 크랜머(1489∼1556)를 임명했다.

크랜머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었고,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헨리 8세는 영국교회의 제도나 교리를 새롭게 제정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영국 성공회가 여타 개신교(칼뱅의 개혁주의, 루터교회 등)와 비교해 가톨릭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주된 원인은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헨리 8세의 가장 큰 관심은 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크랜머도 신앙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도원 폐쇄에 앞장섰다.

성경의 번역

크랜머의 개혁 작업 중에서 분명히 높이 평가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국 종교개혁이 성경에 근거를 두도록 이끌었다. 16세기 초 성경의 영역(英譯)을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크랜머는 윌리엄 틴데일의 제자였던 커버데일에게 영국교회가 사용할 새로운 성경 번역을 부탁했다. 그것이 바로 ‘대성경(The Great Bible, 킹제임스 성경 번역본의 토대가 됨)’이다. 이 성경의 서문을 그가 직접 썼는데, 그 일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우겠다. 어리석음을 꾸짖어야 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스스로 찾아보겠다. 수정해야 하고 정정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면, 그리고 권고나 위로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잘 배울 것이다. 성경 안에만 영혼의 살찐 초장이 있다.”

크랜머는 이 성경을 교회의 눈에 띄는 장소마다 비치해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크랜머의 많은 개혁 작업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루터나 칼뱅과 같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헨리 8세를 교회의 머리로 만드는 작업(수장령)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이후 왕실의 잘못에 눈을 감아버리고 때로는 그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헨리 8세는 이후 무려 다섯 번이나 이혼해 모두 6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과정에서 크랜머는 왕의 결정을 아무 비판 없이 승인했던 것이다.

왕의 힘을 빌려 영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실의 잘못을 눈감아 주었던 것일까. 신자들은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일인지 가끔 혼동한다. 아마 크랜머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왕실의 힘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가려던 그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에드워드 6세가 6년 만에 병사하고, 에드워드의 이복 누이인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영국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면서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이혼한 캐서린의 딸이었으므로, 영국교회가 다시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해야만 자기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고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추진한 개혁 작업을 탄압했고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복귀시키고자 했다.

간신히 지켜낸 개혁의 정신

메리 여왕은 크랜머의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했고 그를 처형하기 직전, 사면을 미끼로 크랜머에게 자신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는 한편, 크랜머 자신의 과거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크랜머는 메리의 강요에 못 이겨 철회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크랜머는 교황의 법정에 소환돼 이단 혐의로 고발됐고 본인도 공개적인 화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형 직전 공개적인 철회 성명을 내도록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이를 통해 여왕의 사면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철회를 취소하여 소신을 지켰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였다.

“이러한 철회 성명은 내 맘 속에 진정으로 믿고 있는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단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들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써야만 했던 나의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래서 나는 내가 화형에 처해질 때 그 손을 먼저 태울 것입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반 그리스도적이기 때문에 그의 잘못된 모든 교리를 나는 거부합니다.”

크랜머는 화형장에서 결국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내밀었고 그 손이 다 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화염에 자기 몸을 맡겼다. 운명의 순간, 그는 스데반처럼 크게 외쳤다. “주 예수시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영국의 옥스퍼드를 방문하면 크랜머와 그의 동역자 라티머, 리들리가 화형당한 것을 기리는 순교자 탑이 있다. 마지막 순간 그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크랜머는 권력에 아부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아가던 인물로 여겨져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며 사사로서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게 하셨듯이 크랜머에게도 개혁을 위한 순교자로 죽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글·사진 고성삼 목사 (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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