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3편>] 성경을 유일한 권위 삼아 중세교회 잘못된 권력에 맞서

존 위클리프는 14세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로 사역하며 종교개혁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위쪽부터 현재 옥스퍼드대 전경. 위클리프 기념관인 위클리프홀(Hall). 윌리엄 틴데일이 1526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인쇄한 영어 신약성경. 이 성경은 영국 런던의 영국도서관(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다.
 
존 위클리프



 
고성삼 목사


제3편 ‘오직 믿음으로’를 시작하며

종교개혁에서 믿음의 불시험을 통과한 자들만 ‘개혁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필자는 ‘오직 믿음으로’ 주를 따르며 말씀을 사랑했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을 찾아갔다. 존 위클리프와 윌리엄 틴데일을 위시해 토마스 크랜머 등 순교자, 그리고 존 녹스와 청교도, 웨일즈 부흥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부터 이미 유럽에서는 중세교회의 만연된 부패와 부조리에 대항했던 개혁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주로 활동한 존 위클리프(1324∼1384·사진)는 중세의 잘못된 제도와 사상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키며 종교개혁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린다.

존 위클리프, 그는 누구인가

위클리프는 요크셔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수학을 공부했으나 훗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학교 교수로 성경을 깊이 연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마침내 29세에 거듭남의 체험을 한다. 이 체험 이후 위클리프는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개혁 원칙을 굳건히 세운다.

그 이후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 사제로 임명 받아 사역하면서 교황의 잘못된 권력으로부터 영국교회를 지키려고 시도했고, 귀족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던 수도원과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섰다. 당시 중세교회는 성경에서 벗어나 잘못된 교회의 전통에 의해 좌지우지 됐고, 세속 권력과 결탁하며 과중한 세금 징수와 경제적 수탈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위클리프의 중심 사상은 성경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주권(Lordship)’ 혹은 ‘지배(dominion)’였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다스리실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다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지배권을 일부분 빌려 쓰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잘못 사용한다면 그 권위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교황의 권위와 교회 전통이 성경보다 더 우위에 있던 중세적 상황에서 교황의 권위마저 거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혁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1381년 당시 지주들에게 착취 받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이용됐고, 이후 그의 사상과 저술은 극히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히며 탄압이 가해졌다. 그의 책들은 불태워졌고 추종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1384년 병을 얻어 죽었으나 그의 유해는 1428년 다시 파헤쳐져 불태워지고 재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지는 부관참시의 치욕을 겪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렇게 핍박을 가하면 위클리프의 사상과 영향은 사라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도전 정신은 오히려 더욱 맹렬히 전파됐다. 위클리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들 중 많은 부분이 성경의 내용과 위배된다고 보았고, 성경의 권위가 잘못된 교회의 전통들보다 위에 있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신실한 성도 모두에게 주신 것이지, 성직자들에게 독점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용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믿었다.

중요한 두 축, 말씀과 전파자

위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히더포드의 니콜라스와 존 피비 등 옥스퍼드의 제자들에 의해 실현돼 마침내 1382년 영어로 번역된 신구약 성경이 출간됐다. 라틴어로 성경이 번역 된 이후 1000년 만에 나온 번역성경이었고, 이는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성경의 보급으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 ‘이단의 저술’로 규정하면서 성경 전파를 막았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의 반대에도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00여년 후에 등장한 윌리엄 틴데일(1494∼1536)은 영국을 떠나 종교개혁이 번져가고 있는 독일로 피신,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본국으로 밀수출 했다. 위클리프의 성경이 라틴어를 번역한 것이라면, 틴데일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체포돼 이단으로 정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틴데일의 제자인 커버데일은 1535년 인쇄된 영어성경을 최초로 출간했고, 친구인 매튜와 함께 1537년 커버데일 성경을 개정해 ‘매튜 성경’을 출간한다. 이 성경은 영국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대성경(The Great Bible)’으로 개정돼 영국에서 정식으로 사용됐다. 영국교회는 이 성경을 기반으로 1611년 ‘흠정역(The King James Version)’을 출간했고 이후 성경을 통해 수많은 부흥과 대각성, 그리고 신학의 발전이 일어났다.

위클리프가 남긴 또 다른 중요한 유산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그가 파송한 ‘가난한 설교가들’이었다. 이들은 ‘중얼거리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롤라드파(Lollards)’로 불렸다. 그들은 성경적 복음의 선포가 없었던 중세시대의 교회를 위해 위클리프가 키워낸 순회 설교자들이었다. 성경말씀에 입각해 단순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복음이 없었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의 사역은 너무나도 중요한 사역이었다.

당시 대부분 가톨릭 사제들은 소명 의식 없이 그저 하나의 직업으로 종교적 예식을 집전할 뿐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이며 이러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사역자로서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강조했다. 롤라드파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그들 중 많은 수가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롤라드가 남긴 영향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 특히 체코의 프라하에서 얀 후스에 의해 계승돼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됐다.

칼과 불로 말씀을 맛본 자들

위클리프와 이어지는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오늘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첫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쪼개짐을 당하고 벌거벗겨짐을 당했던 사람들만이 개혁자로 세워졌다. 뜨거운 은혜를 말씀으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불 시험이 난무했던 종교개혁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후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나 칼뱅에게도 이와 동일한 체험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은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개혁자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한 살아있는 진리이자 부인할 수 없는 동력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역자들과 성도들도 이와 같이 말씀과의 만남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은 어느 서점을 가든 너무나 잘 인쇄 되어 있는 성경이 넘쳐나고, 휴대폰에 성경이 필수 앱으로 깔려 있는 시대이지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시대가 아닐까 우려된다. 기우이길 바란다.

글·사진 고성삼 목사 (사랑의교회 대외총괄 목사),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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