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아이들의 큰 그늘 되다, 예수 마음으로

작가 이오덕은 생의 마지막 시기를 충북 충주시 무너미마을에서 보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편으로 그가 살던 아담한 돌집이 있다.
 
이오덕의 돌집, 아들이 기거했던 집으로 현재는 이오덕의 제자가 머물며 글을 쓰고 있다. 이름은 시집 '까만새' 표지에서 발췌한 친필이다(위에서 부터).
 
농촌아이들의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사꾼이 되겠지'와 육필원고, 경북 청송 화목교회, 회목초등학교 전경(위에서 부터).



 
젊은 시절의 이오덕(왼쪽)과 권정생. 권정생이 혼자 기거하던 경북 안동시 일직교회 앞에서 두 사람이 함께 했다. 양철북 제공


“아무도 없는 교실에는 때 묻고 찌그러진 조그만 책상들이 60여 개 나란히, 꼭 아이들이 귀엽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온갖 희망과 걱정과 슬픔을 안고 67명의 어린 생명들은 이 교실을 찾아올 것이다. 교사라는 내 위치가 새삼 두려워진다. 이렇게 괴로운 시대에 내가 참 어처구니없는 기계가 되어 어린 생명들을 짓밟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다. 두고두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 이 아이들을 키워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세계에 파고들어 가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이오덕의 1962년 9월 21일 일기 중에서)

평생 사람을 살리는 교육, 우리글과 우리말을 살리는 운동에 헌신해 온 이오덕(1925∼2003). 그는 42년 동안 교육 현장을 지켜온 교육자이자 시, 수필, 동시, 동화, 평론을 발표한 문학가이다. 또 우리글 바로 쓰기에 관한 책을 쓴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한 삶에서 길을 찾고 마지막까지 그 길을 걸었다. 그의 교육사상은 어린이의 순수함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정직한 삶을 위한 열망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어린시절 주일학교에서 경험한 신앙이 밑바탕이 됐다.

“평화를 주세요/ 평등을 주세요/ 자유를 주세요/ 기쁨을 주세요/ 빛을 주세요/ 아침 이슬을 온몸으로 안고 있는 풀잎같이!”(이오덕의 ‘풀잎의 시’)

나무처럼 산처럼 살다 간 사람

그가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무너미마을을 지난 16일 찾았다. 3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바람을 머리에 이고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뒤로 고요한 가을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마당을 지나면 아담한 돌집이 나온다. 그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기거하며 집필했던 곳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나무와 풀만 우거져 있다.

그는 무너미마을에 살면서 연수원(현재 이오덕학교)이 있는 고든박골을 자주 오르내렸다. 집 마당과 마을길과 숲에서 만나는 나무와 풀과 딸기와 개와 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하늘과 구름과 안개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글을 썼다. 시집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고든박골 가는 길’, 수필집 ‘나무처럼 산처럼’의 배경이 된 곳이다.

“고든박골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부용산 서쪽자락 너머로/ 지는 해 바라보며 오는 길에∼하느님은 그래도 우리 이 몹쓸 인간을 생각해서/ 맑은 하늘을 주시어 벼가 익게 하시고/ 옥수수를 따먹게 하시고”(시 ‘고든박골 가는 길 4’)

무너미마을에서 10분쯤 걸어가면 고든박골에 이오덕학교가 있다. 학교가 있는 그 골짜기가 ‘밭이랑을 곧게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곧은밭골’이라고 했는데, 입말대로 옮기다 보니 고든박골이 됐다. 학교 앞엔 가지를 잘라내 수확만 남겨둔 황토빛 고구마밭이 시야를 꽉 채웠다. 밭이랑이 곧게 뻗어 있었다.

학교 안에 이오덕 시비가 세워져 있다.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 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새와 산’)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니 그가 생전에 가끔씩 낮잠을 잤던 양지 바른 곳에 그의 묘가 있다. ‘죽어서 땅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가 한줌 흙이 되었다.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

이오덕은 ‘아이들을 억누르는 교육’과 ‘인간성 죽이는 교육’을 거부했다. 아이들과 산을 오르고,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삶’을 즐기게 했다. 꺾인 해바라기를 안타까워하고, 교실 안에 잘못 들어온 새를 날려 보내며 아이들과 함께 생명의 존귀함을 느꼈다.

아동문학에서 그가 비판했던 것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관념화함으로써 현실을 외면케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동심(童心)천사주의’를 깨고자 했다. 어른들의 글을 흉내 내는 기교로 글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생활에서 우러난 ‘글쓰기’를 할 때 어린이는 모두 시인임을 보여준 책이 그가 엮은 농촌아이들의 시모음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등이다.

“아버지하고/ 동장네 집에 가서/ 비료를 지고 오는데/ 하도 무거워서/ 눈물이 나왔다…제비야/ 비료 져다 우리 집에/ 갖다 다오 하니/ 아무 말 안 한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나는 슬픈 생각이 났다.”(안동 대곡분교 3학년 정창교가 70년 6월 13일에 쓴 ‘비료지기’)

예수님처럼 아이들을 소중하게

그에게 정서적 토양을 만들어 준 고향 경북 청송의 화목마을로 향했다. 이오덕은 경북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름 오덕은 태어난 해, 오(五)와 덕계리에서 덕(德)을 따온 것이다. 유교집안에서 홀로 기독교를 믿게 된 그의 아버지(이규하 장로)는 신앙생활을 위해 1900년 초 의성 사곡에서 화목으로 솔가해 화목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했다.

당시 주일학교에서 배운 동요와 동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읽어주신 문학작품, 아름다운 자연 환경, 현대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지역사회가 교육사상의 바탕이 됐다. 비록 식민지 치하였지만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면서 자란 일과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와 동화를 그는 평생 즐겁게 기억했다. 이런 바탕이 교육 현장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잣대가 되었다. 아이들을 예수처럼 소중하게 섬기는 정신은 그가 일생 동안 지켜가려던 정신이었다.

“그가 40년 동안 쓴 일기를 보면 여러 곳에서 신앙고백을 하거나 기도문을 써놓았다. 이런 속내와 그의 삶의 궤적을 볼 때 그가 평생 지켜온 어린이관과 동심론 바탕에는 기독교 사상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정환의 동심론이 천도교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듯이 이오덕은 기독교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이오덕에게 있어 어린이는 예수다. 동심은 예수의 마음이다.”(이주영의 ‘이오덕에 대한 연구사’ 중에서)

화목마을은 현서면의 중심지다. 1921년에 세운 화목초등학교가 한가운데에 있고 골목 안에 100년이 넘은 화목교회가 있다. 화목초등학교는 이오덕 선생이 나온 모교면서 교사로 몸담았던 곳이다. 그는 경북 부동공립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4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55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한국일보에 수필이 당선됐다.

그는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관료적 학교 풍토와 교사로서 정체성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혹은 자신의 안위 중심으로 생활하는 교직문화에 대한 안타까움과 의분을 느꼈다. 이 가운데서 살아 숨쉬는 아이들을 보면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듯 기뻐했다. 그는 당시 정부의 감시와 간섭으로 더 이상 교직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86년 교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눈은 늘 아이들을 향했다.

“42년의 교직을 어쩌면 이렇게 미련도 한 올 없이 헌옷 벗어던지듯 훌훌 벗어던지는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딴 곳에다 꿈을 두었던가? 아니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내 사랑은 아직도 저 총총한 눈망울 반짝이는 아이들한테 가 있다. 내 꿈은 저 아이들이다.”(이오덕의 1986년 2월 27일 일기 중에서)

이후 과천으로 이사와 한국글쓰기연구소 활동과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다.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를 지적하고 걸러내기 위해 ‘우리문장 바로쓰기’(92년) ‘우리글 바로쓰기’(95년)를 집필했다. 말년엔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끼며 장남 정우가 있는 무너미마을로 내려와 자연스럽게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산새같이 두 날개 파닥거리며 그가 꿈꿔온 본향으로 떠났다. “이제 나는 내 눈부신 빛과 노래가 기다리는/ 내 본향으로/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산새같이/ 한 마리 새가 되어 두 날개 파닥거리며/ 빛과 노래가 가득한 그 곳으로 간다”(작고하기 9일 전 쓴 시 ‘이승은 하룻밤’ 중에서)

그는 평생 풀·꽃·나무·흙·바람,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런 문학과 교육을 위해 글을 쓰고 실천했다. 그의 동시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려는 성난 외침과 같았다. 그의 흔적 속에 군사독재, 이농, 산업화 시대를 가파르게 통과했던 한 지식인의 내밀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이오덕 그리고 권정생]
열두 살 나이 차이 뛰어넘은 영원한 글벗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1937∼2007)과 이오덕(그림)은 평생의 글벗이었다. 1973년 1월 18일 오후, 이오덕은 안동의 일직면에 내려 다시 5리를 걸어 조탑마을의 일직교회를 찾는다. 한 신문에 실린 동화 '무명 저고리와 엄마'를 보고 작가 권정생을 만나러 간 것이다.

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동화를 썼던 권정생의 문간방에는 이불과 간단한 자취 도구만 있었다. 다만 책들이 가득 꽂힌 게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이오덕은 마흔아홉이었고 권정생은 서른일곱이었다. 이후 이오덕은 어른 아이 모두 권정생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작품을 온 힘을 다해 세상에 알렸다.

권정생이 자신을 외톨이라 부르는 게 이오덕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원래부터 외톨이였습니다. 출생지가 남의 나라(일본)였던 저는 지금까지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아홉 살 때 찾아온 고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았는지요.… 고국은 나에게 전쟁과 굶주림, 병마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위에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을…그러나 메말라진 흙 속에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어, 여지껏 목말라 허덕였습니다."(1973년 2월 8일 편지에서 권정생이 쓴 글)

그때부터 시작된 권정생과 이오덕의 편지 교류는 2002년 11월까지 이어진다. 이듬해 8월 이오덕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4년 뒤 권정생은 '강아지 똥' '몽실언니' 등 한국 아동문학의 한 정점이 될만한 작품들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두 사람은 12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권정생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弟)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충주·청송=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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