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예수님 자리’를 우상과 인간으로 가득 채운 중세 성당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있는 세 개의 문중 하나인 ‘심판의 문’.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저울로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종교개혁가 장 칼뱅 생가에 있는 ‘성경의 무게’ 판화는 그 어떠한 것도 성경보다 의미 있고 무거운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랭스 대성당의 돌로 부조된 괴물들. 악귀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부적 같은 의미다.
 
서대천 목사


종교개혁의 흔적을 찾아 나선 영성답사가 감격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동과 희열이 넘쳤지만 고통과 눈물의 시간이기도 했다. 때론 영적 의분을 느껴야 했다. 로마가톨릭 성당을 답사할 때가 그랬다. 찬란한 건축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중세의 성당들은 하나님 대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우상들만 가득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하나님이 무게를 달았는데 부족함)”(단 5:25)이라는 영서(靈書)를 떠올렸다.

중세 성당의 우상들

필자의 이번 답사 목적은 가톨릭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권이 박해를 일삼았던 위그노의 순교적 삶의 현장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당시 가톨릭의 실상을 통해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인류의 메시아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있고, 온갖 성물과 성인의 초상화가 즐비한 성당을 방문하면서 필자는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교회사 초기의 카타콤처럼 위그노의 어둡고 습한 비밀 집회장소와 달리 세상의 온갖 권위와 권력 위에 세워진 성당들은 하나님의 집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성당에서 돌로 부조(浮彫)된 괴물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악귀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대관식이 행해졌던 랭스 대성당이 대표적이었다. 그곳은 우리가 익히 들었던 프랑스 구국의 여성, 잔 다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샤를 7세 때 영국군의 침공으로 왕이 대관식을 치루지 못하자, 잔 다르크가 분연히 나타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니 행사를 치르라고 촉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이라고 한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생트 샤펠 성당은 루이 9세가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가지고 와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가시면류관이 어떻게 보존되었으며,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2000년이 지나도록 원형이 유지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보다 가시면류관을 더 신성시하는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신앙관과 전통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공로를 자랑하는 저울

프랑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명소는 어디일까. 통계에 의하면 바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필자도 한참을 기다려 입장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려함과 예술의 극치였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는 온갖 우상이 자리하고 있을 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노트르담 뜻 자체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성모 마리아’를 뜻하고 있어, 성당 이름 자체부터 하나님, 예수님보다도 성모 마리아를 더 우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당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심판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 마리아의 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은 ‘성녀 안나의 문’이다. 말하자면 세 개의 문 중 하나는 예수님과 관계가 있고, 나머지 두 문은 마리아와 안나 등 인간을 숭배하는 문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바로 심판의 문에 새겨져 있는 저울이었다. 이 저울은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내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천국을 간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느와용 칼뱅의 생가에서 본 ‘성경의 무게’ 판화와 오버랩 되었다. 그 저울은 인간의 그 어떤 선행이나 성인도, 심지어 그 어떤 마귀의 힘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무게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칼뱅이 개혁신앙에서 강조한 ‘오직 성경’과 성경의 주인이신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저울이다.

종교개혁은 필연적 사건

필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톨릭의 부패한 외형이 바로 인간의 부패한 내면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20∼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16세기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을 교회 역사가인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교황제도의 심각한 세속화다. 신의 대리자라는 명분부터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인간의 죄악에서 나온 욕망이라는 것이다. 급기야 교회의 분열로 교황이 둘, 셋씩 존재하게 되었으며 대다수 성직자들은 진정한 목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정치가였다. 성직 매매와 족벌주의로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어린아이가 교황이 되기도 했으며. 성직자의 독신제는 온갖 부정(不貞)과 성적 타락을 가져와 사생아가 속출했다.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예수님처럼 청빈을 추구해야 할 사제들이 성직록(聖職錄)과 지상의 재물을 탐함으로 절대 다수의 백성들은 노예처럼 빈한한 생활을 해야 했다.

둘째, 신학의 타락이다.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신학이 스콜라주의에 빠져 공허한 이론과 사변(思辨)의 미궁을 헤매고 있었다. 성경은 긴 세월 사제의 전유물이었고, 교육은 사제들과 귀족의 자제들에게만 허용돼 있었다. 웃지못할 일은 가령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루터의 동료 교수로 당대에 널리 알려진 칼슈타트(Carlstadt)는 성경 사본을 보기도 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교육 현실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절대 다수의 평신도들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해 강단에서 선포되는 사제의 강론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특수 계층에게만 성경을 허용하고 대다수 성도들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면죄부를 비롯한 물질적 타락으로 교회가 경건을 상실했다. 교회의 경건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그리고 성령의 인격적 감화로부터 흘러나와야 하는데 중세 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기금을 충당하기 위해 죄의 용서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속임수를 씀으로써 교회는 타락의 온상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때보다 나은가

필자는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체험한 영적 두려움을 지금 이 순간에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실상은 어떤가. 분명 한국교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헌신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중세의 부패한 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본연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고 있는지, 당시 성직자들의 세속적인 모습이 목회자들에게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타락하고 있지 않은지, 오늘의 신학이 복음과 교회를 위해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질문해야 한다. “한국교회를 저울에 달아보니 안 되겠다”는 주님의 엄위한 음성을 듣기 전에 환골탈태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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