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한국교회, 웨슬리처럼 헌신하는 주님의 종이 나와야 한다

1720년대 말 영국 옥스퍼드대 링컨 칼리지의 존 웨슬리 방에서 시작된 홀리클럽운동 모임 광경.
 
지금의 링컨 칼리지 전경으로 웨슬리는 이곳에서 교수급 특별연구원인 펠로우로 10여년간 재직했다.
 
존 웨슬리의 신성구락부 출발점이 되었던 옥스퍼드성(城) 감옥 전경.
 
서대천 목사


필자는 웨슬리가 공부하고 사역한 옥스퍼드대에 가서 옥스퍼드 성(城)에 관심을 가졌다. 웨슬리가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를 졸업한 이후 1726년 링컨 칼리지 특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시작한 ‘홀리클럽운동’이 바로 이 성의 재소자 방문을 계기로 시작됐다는 일설 때문이다.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대식당은 웨슬리를 비롯한 영국 역대 위인들의 초상화가 보존된 명소이기도 하지만 ‘해리 포터’의 영화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옥스퍼드 재소자 전도로 시작된 성결운동

옥스퍼드에는 두 곳에 감옥이 있었다. 하나는 성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의 북문 옆에 있는 감옥(The Bocardo)이다. 웨슬리는 당시 동생 찰스 웨슬리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전도하며 자선을 베푸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감옥을 찾았다. 재소자들에게 음식과 의약품 연료 등을 나누며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옥스퍼드 성의 감옥은 오래 전에 폐쇄되었다가 2005년 다시 개방돼 역사적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웨슬리가 교도소 방문을 계기로 당시 부패한 사회 현상에 충격을 받아 성결운동을 시작했는지, 아니면 평소 존경한 토머스 아 켐피스나 윌리엄 로오의 영향으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깨어 있었던 웨슬리의 깊은 영성이었다. 옥스퍼드 캠퍼스 내 링컨 칼리지의 작은 방(홀리클럽 모임이 있었던 웨슬리의 사무실)에서 시작한 성결운동이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성령의 불씨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들의 지속적인 성경공부와 엄격한 경건생활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질서주의자들(Methodists)’, 즉 규율에 얽매인 사람들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웨슬리와 동료들은 이런 비난에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은 오후 3시까지 금식하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시간을 가졌는데, 서로를 깨워주기 위해 보초를 서기도 했다. 낮에는 학교 일에 힘을 쓰면서도 밤을 밝혀 성경을 공부했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영적 습관이 몸에 밴 것은 유년시절과 청소년기에 수도원학교에서 익힌 영성훈련 덕분이었다.

어떤 이들은 웨슬리의 홀리클럽 운동 기간이 길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상당히 긴 기간 지속됐음을 알 수 있었다. 1726년에 시작된 이 운동은 1735년 미국 조지아로 전도를 하기 위해 2년 남짓 학교를 떠났다가 다시 복직해 1751년 교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25년이나 계속됐다.

어떤 연구가들은 이 운동은 1751년 웨슬리가 링컨 칼리지 펠로우를 사임한 이후에도 계속됐으며 그의 순회 전도의 모든 과정을 성결운동의 연장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도 한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웨슬리는 교회의 갱신과 부패한 사회 정화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그의 일관된 ‘성화론’ 설교는 이러한 웨슬리의 신성클럽운동을 증거하고 있다.

21세기 한국교회, 18세기 영국교회 회복을 본받자

하나님께서 영국을 위해 준비하신 한 사람의 종으로 말미암아 18세기 영국교회가 개혁되고 사회적으로는 도덕이 회복됐으며 따라서 산업혁명기의 경제도 활력을 되찾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16세기 장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시작한 개혁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 것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청교도의 신앙을 물려받은 ‘질서주의자’들이 영국의 감리교회(Methodist Churches)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결교회는 그 출발은 다르지만 교리적 기초는 웨슬리의 신학에 있다고 한다. 이처럼 감리교를 비롯해 성결교와 오순절교회가 존 웨슬리의 헌신으로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모습이 18세기 영국의 상황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역사와 문화적 환경은 다르지만 웨슬리가 복음을 전하던 18세기의 영국과 21세기 한국은 심각한 세속화시대라는 점에서, 그리고 도덕적 부패지수가 높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국교의 권위 아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생명력을 상실해 있었던 당시의 영국교회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니 오늘의 한국교회는 18세기 영국교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 모른다. 교회의 영적 권위는 세상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돼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속화되는 이중적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경건성과 생명력을 잃은 영국교회가 존 웨슬리의 헌신으로 갱신됐다는 사실은 21세기의 한국교회도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웨슬리의 영향력으로 윤리와 경제가 회복됐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도 희망이 있음을 알려준다. 웨슬리 사후에 당시 왕실 고문변호사였던 어거스트 비렐이 “존 웨슬리야말로 영국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듯이 한국교회 목회자들도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된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개혁교회와 감리교회의 합작인 한반도 선교

종교개혁사는 칼뱅의 개혁사상이 영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국교회 정책에 불만을 품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제네바의 칼뱅주의 교회개혁을 모방하여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요구한 데서 청교도운동이 시작됐다고 가르친다. 1542년 청교도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크롬웰혁명 이후 왕정복고가 이뤄지기까지 20년간 청교도들은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다시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되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을 찾게 된다. 그리고 청교도 신앙으로 시작된 미국교회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왔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반도 복음 전래에는 개혁교회와 감리교회가 함께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감리교회의 본격적인 조직은 1784년에 이뤄졌지만 그 이전부터 메소디스트 정신은 발전을 거듭해 1768년 미국 뉴욕에 첫 감리교회를 세우고 코크(T Coke)를 첫 감리교 목사로 안수했다.

또한 18세기 영국의 웨슬리 성결운동이 19세기 미국의 성령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영국의 감리교 정신은 미국을 통해 일본 동경에 전파돼 동양선교회(OMS)가 조직됨으로써 일본과 한국의 성결교회 발판이 됐다. 한반도 최초의 선교사 중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이고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교회 소속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는 그 출발부터가 개혁교회와 감리교회의 합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분열을 멈추고 교파를 초월해 연합과 일치를 이뤄야 할 역사적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글·사진=서대천 목사(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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