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명랑한 찬송가, 풍금 소리를 추억하다

김동리는 이따금 평생 친구인 박목월 시인과 경주 황성공원을 거닐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나무숲이 우거진 황성공원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와 시인이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생각의 숲이었다.



 
소설 속 모화가 ‘예수가 진짜인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굿을 하다 죽는 곳으로 그려진 예기소 현재 모습. 경주 서천과 북천, 남천이 합류하면서 소용돌이가 생기고 파져 깊은 소가 생겨났다고 한다.
 
작가가 태어나 자란 경북 경주시 성건동 옛 집 터.
 
김동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세월의 애수가 깃든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는 한국문학의 거목 김동리(1913∼1995)의 고향이다. 작가가 성장하던 시절, 경주는 신라 고도의 옛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했을 것이다. 토속적·무속적 분위기가 짙게 감도는 경주는 그의 작품 속에서 조각보처럼 펼쳐져 있다.

‘무녀도’는 경주 예기소, ‘황토기’는 경주 서남산 입구의 산길이 배경이고 ‘까치소리’는 현곡, ‘바위’는 성건동이 배경이다. 그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민족정신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 1일 ‘무녀도’의 배경이 된 경주를 찾았다.

‘잡성촌’이라 불리던 마을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된 후 이듬해 발표한 단편소설 ‘무녀도’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무녀도’는 우리의 토속 신앙인 샤머니즘과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신앙의 충돌로 인한 모자간의 대립과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십여 리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 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의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린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무녀도’중에서)

작가가 태어나 자란 경주시 성건동은 옛날에 점집이 많았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소설 속 모화가 살던 성건동의 퇴락한 옛날 기와집과 작가의 생가는 많은 집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건동 경주청년회의소 북쪽 형산강변 당산나무가 있는 작은 공원(삼랑사지 당간지주)에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동리생가’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1960년대까지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급속한 도시화로 헐리고 그 후 터가 분할되어 세 집이 공유한 채 오늘에 이른다.

깊고 푸른 소, 죽음에 대한 불안감

김동리는 자신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죽음의 공포 밑바닥엔 삶을 향한 강한 열망이 자리한다. 그에게 소설은 죽음을 통해 생명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끈질긴 탐색의 기록이다. 특히 ‘무녀도’의 죽음관은 그 전체의 색조가 한국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으로 물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입각한 부활의식을 반영한다. 작가에게 죽음과 사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창조적 영감이 되었다.

성건동 생가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예기소는 소설 속 모화가 ‘예수가 진짜인지 자신이 섬기는 신령이 진짜인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굿을 하다 죽은 곳이다. 경주의 서천과 북천 그리고 남천이 합류해 생겨난 깊고 푸른 소이다. 방향이 서로 다른 물줄기가 합류하면서 소용돌이가 생기고 땅이 파져 깊은 소가 생겨났다고 한다.

예전엔 그 깊이가 ‘명주꾸리 하나’(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하나 지금은 평범한 강물처럼 보인다. 예기소 부근은 현재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지역주민들의 쉼터이다.

‘무녀도’는 김동리가 집안이 망해 경성보고를 중퇴하고 고향에 낙향했을 때 초안을 잡은 작품이다. 당시 그는 어물전을 하는 형님의 가게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틈나는 대로 예기소에서 작품을 구상했다. 그는 “예기소의 흐린 물을 바라보며 모든 과거와 모든 죽음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북받쳐 오르곤 했다”고 회상하곤 했다. 넘실거리는 푸른 소를 바라보니 옛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소설 속 무당 모화는 도깨비굴 같은 낡은 집에서 귀가 먼 딸 낭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과 마주칠 일 없는 쓸쓸한 모녀의 일상에 집 나갔던 아들 욱이가 돌아온다. 오랜 헤어짐 끝에 상봉한 기쁨과 반가움도 잠시, 고향에 남은 어머니의 삶과 외지로 나가 새로운 문명을 접한 아들의 삶은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낯선 타지에서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욱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욱이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하나뿐인 여동생을 비현대적인 미신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결심한다.

반대로 모화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번듯한 청년이 되어 자기 곁으로 돌아온 것을 오로지 천지신명의 깊은 은혜로 여겼다. 그런 모화에게 밥상머리에서 ‘주기도문’이라는 것을 외우는 아들의 행동은 그가 고쳐 줘야 할 신병(神病)이었다. 모화는 욱이의 성경을 태우다가 이를 제지하는 아들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다. 욱이는 끝내 소생하지 못한다. 그 사이 마을에는 욱이의 주선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교가 퍼지기 시작한다. 시간은 흘러 모화는 물에 빠져 죽은 부잣집 며느리의 혼을 위로하는 굿을 하다 죽는다.

마을에 들어선 조그만 교회당

소설엔 기독교가 경주 지방에 처음 들어오던 무렵의 시대적 배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화의 죽음은 오직 파멸이지만 욱이의 죽음은 교회의 설립이란 열매를 남겼다.

욱이는 병석에서 자신을 돌봐준 미국인 선교사인 현 목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직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 사귀 들린 자와 우상 섬기는 자가 매우 많다며 하루빨리 이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교회가 세워지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목사님 저는 하느님의 은혜로 무사히 오마니를 찾아왔삽내다. 그러하오나 이 지방에는 아직 우리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서 사귀 들린 자와 우상 섬기는 자가 매우 많은 것을 볼 때 하루바삐 주님의 복음을 이 지방에 전파하도록 교회를 지어야 하겠삽내다. 하루바삐 이 지방에 교회되기를 하느님께 기도 올려주소서.”(‘무녀도’ 중에서)

소설은 “이 고을에도 조그만 교회당이 서고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것은 바람에 불처럼 온 마을에 뻗쳤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1902년, 점집 가득했던 마을에는 초가를 얹은 경주읍 교회가 생겼다. 현재의 경주제일교회다. 교회는 1909년 경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계남학교를 설립했는데, 소년 동리는 이 학교를 6년간 다녔다.

작가의 유년시절은 가정적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신앙에 의지했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그의 어린 시절의 체험들과 어머니를 통한 기독교의 접근은 소설의 기틀이 되었다.

‘무녀도’는 김동리의 유년 시절도 반영되었다. ‘명랑한 찬송가 소리와 풍금 소리, 성경 읽는 소리와 모여 앉아 기도를 올리고 맛난 음식을 향해 즐겁게 웃음 웃는 얼굴들’이란 표현은 유년의 추억일 것이다. “경주에 교회가 이렇게 속히 서게 된 것은 이분의 공로올시다. 욱이는 평양 현목사에게 진정을 했고 현목사는 욱이의 편지에 의해 대구 노회에 간청을 했고 일방 경주 교인들은 욱이의 힘으로 서로 합심하여 대구 노회와 연락한 결과 의외로 속히 교회 공사가 진척된 것이라 하였다.”(‘무녀도’ 중에서)

목월과 거닐던 황성공원

천년이 넘은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황성공원은 김동리가 평생 친구인 동향의 박목월 시인과 이따금 거닐며 마음을 나누었던 곳이다. 세 살 연배인 동리는 목월에게 ‘우리가 문단의 주역이 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대범했고 목월은 생계를 위해 금융조합에 취업해서도 고독하게 시만 생각했던 자발적 외톨이였다. 그렇게 달랐던 이들이 작품을 구상하고 문학을 생각하며 자주 거닐었던 곳이 바로 이 황성공원이다.

이들의 우정은 생을 마치고도 계속되고 있다. 토함산 중턱 불국사 일주문 건너편에 두 문인을 기념하기 위해 동리목월문학관이 세워졌다. 한 건물에 왼쪽은 동리문학관 오른쪽은 목월문학관이 나란히 있다.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유족들로부터 기증 위탁받은 저서와 7000여종의 장서, 육필원고를 비롯해 문학자료 1500여점, 생활유품 250여점 등 국내문학관 중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동리문학관을 나오자 한 줄의 문학평이 함께 따라 왔다.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이어령) 이는 ‘무녀도’에서 모화가 죽고 나자 딸 낭이가 나귀를 타고 곳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무녀도를 그리듯, 동리의 문학은 나귀처럼 지금도 어느 길에서인가 천천히 걷듯 재생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동리처럼 생각하기]
“문학 지망생들 글 쓰려거든 성경 많이 읽고 죽음을 생각하라”


유년시절 우울하고 병약했던 김동리(사진)는 계절마다 이유 없이 앓아누웠고 혼자서 산과 들을 배회했다. “나는 별을 쳐다보면서 언제나 죽음과 선이를 생각하게 마련이었고 그것은 그만큼 늘 슬픔이요 두려움이기도 했다. 선이가 죽은 뒤 오랫동안 누구와도 어울려 놀지 않았다. 나의 작은 가슴에는 이날까지 씻어지지 않는 죽음이란 검은 낙인이 찍혔다.”(산문 ‘소꼽동무 선이의 죽음’ 중에서)

그가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년시절, 두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소꿉동무 선이의 죽음과 고종사촌 누이 남순이의 죽음이 그것이다. 개인적인 죽음의 체험과 신라 천년의 전설이 수없이 어려 있는 경주의 산하는 동리문학의 중추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그의 문장엔 인생의 심연을 향한 집요한 시선이 있다. 이것이 소설을 이끌어온 그의 힘이다.

한 문학잡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종교적인 관심은 어릴 때 마음속에 생겨난,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부터였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다니기도 했는데 근대문학 작품들을 다 읽고 나니까 상당히 허무주의 쪽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인간은 구원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구원의 구체적인 방법은 몰라도 인간의 문제를 신과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지요.”

문학 지망생들에게 글을 쓰려면 “성경을 많이 읽고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했던 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원화하기보다 삶 속에 죽음의 문제를 끌어안고 인생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 없는 마을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의 얼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볼 적부터 죽음을 공기처럼 숨쉬게 되었다. 아침에 피는 꽃과 황혼에 지는 동산의 가을 소리도 이별이 곁들여져 언제나 처럼 슬프고 황홀했다…” (김동리의 시 ‘자화상’ 중에서)

경주=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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