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웨슬리, 성결운동으로 ‘거룩한 나라, 영국’ 꿈꿨다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영국 동북부의 엡워스 생가.
 
웨슬리가 11세부터 6년간 엄격하게 신학의 기초과정을 배웠던 런던의 차터하우스 스쿨.
 
옥스퍼드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전경.
 
존 웨슬리
 
웨슬리가 1738년 5월24일 저녁 모라비안 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현장.


존 웨슬리를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면서 필자는 역사가 필립 샤프가 한 말을 떠올렸다. “칼뱅 사후에 존 웨슬리보다 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면서 사도적인 전도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둔 인물은 없다.” 웨슬리(1703∼1791)는 칼뱅(1509∼1564) 사후 130년 뒤에 태어난 인물이고, 출생을 기점으로 하면 무려 200년 뒤의 사람이다. 종교개혁의 치열한 영적 격변기를 훨씬 지나 태어난 영국의 한 전도자와 칼뱅의 개혁 영성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종교개혁 이후 영국과 존 웨슬리의 영성

필자는 웨슬리의 나라 영국에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칼뱅의 16세기와 웨슬리의 18세기는 시대의 간격이 있을 뿐 동일한 ‘세속화’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심각한 세속화 시대에 한 사람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성시화운동을 전개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영국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성결운동을 전개했다. 칼뱅이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국가)로 만들고자 한 신정정치 운동과 웨슬리가 영국을 종교적, 도덕적으로 거룩한 나라로 만들고자 한 홀리클럽운동은 일맥상통한다. 이는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 사상과도 연결된다고 본다. 이처럼 두 사람은 사회변혁을 추구한 개혁가이자 위대한 영성의 사람이었다.

한편, 두 사람의 신학사상은 예정론과 예지예정론으로 구분되지만, 신학자 조지 셀이 지적한 대로 칼뱅의 신학을 아르미니우스 신학으로 수정한 대표적인 인물이 웨슬리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신학관은 연결점이 있다. 웨슬리의 은총론은 칼뱅주의자들보다도 더 ‘하나님 의존적’이었으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인간의 순응과 협력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본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뿐 아니라 웨슬리는 구원의 전 과정인 칭의와 성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강조한 칼뱅 못잖은 ‘은총 박사’이다. 웨슬리가 만년에 “나의 신학과 칼뱅 신학은 머리카락 하나 정도의 차이”라고 한 것처럼 이들 사상은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립 샤프가 웨슬리를 칼뱅주의자이자 진정한 복음전도자로 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교파와 신학을 초월하여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위해 합력해야 할 것이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필자는 ‘한 책(성경)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존 웨슬리를 만나기 위해 영국 동북부에 위치한 링컨 주의 엡워스(Epworth)로 향했다. 그의 출생지 엡워스는 런던에서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도시다.

웨슬리는 영국성공회 목사인 새뮤얼 웨슬리와 성직자의 딸 수잔나 사이에서 1703년 6월 13일 출생했다. 웨슬리 부부는 19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대다수 어려서 사망했고 존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 등 여섯 자녀만 성장했다. 웨슬리가 태어난 웹워스교회 목사관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어 교회 정원에서 뛰놀았을 유년의 웨슬리를 그려볼 수 있다.

웨슬리가 다섯 살 때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해 그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화염 속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의 부모는 이 아이가 장차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라는 스가랴서 3장 2절 말씀을 마음에 두고 웨슬리의 영성을 위해 매일 성경공부와 기도훈련 등 엄격한 신앙교육을 실시했다.

웨슬리의 영성은 어머니에 의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수도원의 엄격한 도제교육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웨슬리가 11세부터 6년간 런던의 차터하우스 스쿨에서 받은 수도원교육이다. 가정교사로서 아들에게 하루 6시간의 홈스쿨링을 시키고, 2시간 씩 별도로 성경을 가르친 웨슬리의 부모는 아들의 영적 무장을 위해 전통 있는 수도원학교로 보낸 것이다. 이 학교는 옥스퍼드대나 케임브리지대처럼 수도사들에 의해 1349년 세워졌다. 웨슬리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이 학교에 입학했고, 수도원교육의 엄격한 과정을 훌륭하게 마치게 된다. 실제로 차터하우스는 웨슬리가 동문인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건물 구석구석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지아 선교의 좌절과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체험

차터하우스를 마친 웨슬리는 1720년 우수한 졸업 성적으로 40파운드의 장학금까지 받고 옥스퍼드대 중 가장 규모가 큰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웨슬리는 1726년 링컨 칼리지 펠로우(교수급 특별연구원)로 선발돼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봉직하다가 1737년 미국 조지아 선교를 위해 2년 정도 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만족할 만한 선교 결실을 얻지 못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첫 해외 선교의 실패로 깊은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어느 날 그에게 영적인 큰 변화 사건이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이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올더스게이트 집회에 참석해 로마서 강론을 듣던 중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에게 영적으로 일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말하자면 영적 무기력 상태를 극복하고 능력 있는 전도자로 변화된 것이다. 웨슬리는 일기에 이 날 사건을 ‘영적 회심(spiritual conversion)’이라고 했다가 후일 ‘영적 사귐(spiritual conversation)’으로 표현을 바꾸었다. 이 체험 후 웨슬리는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민중 속으로 파고든 전도자

세계교회 역사상 웨슬리만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민중 속으로 파고든 전도자도 없을 것 같다. 당시 그가 행한 연간 1000번 이상의 설교 중 상당한 경우는 번화한 거리나 산간벽지를 찾아 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폭도들의 방해와 돌팔매질을 당하면서도 가난한 노동자 등 소외 계층을 찾아가 전도한 설교자로 알려지고 있다.

가령 그를 배척한 콘월 지방에는 일생 동안 32번이나 방문해 전도했다고 하니 복음에 빚진 웨슬리의 불타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을 타고 복음을 전한 거리는 1년에 평균 8000마일(1만2800㎞), 40년 간 52만㎞로 지구를 13회 이상 순회한 셈이다.

웨슬리 사후 당시 영국 왕실 고문 변호사였던 어거스틴 비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전도하기 위해 유숙했던 여관비를 다 계산한다면 역사적 기록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전무후무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 오늘날 진기한 풍경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조차 발길이 닿지 않은 영국의 산간벽지들을 그는 수없이 찾아 다녔다.”

존 웨슬리보다 더 인간의 삶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킨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글·사진=서대천 목사(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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